「한국의 장기 보수화는 없다」 비평
2008년 박노자는 「한국의 장기 보수화는 없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에서 압승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일어나고 지지율이 급락하자, 한국에서는 일본 자민당과 같은 보수정당의 장기집권이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주장한 글입니다.
당시 진보 진영에는 한국 사회가 장기적으로 보수화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이명박을 압도적으로 선택했고, 한나라당도 강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정부가 크게 흔들리자 분위기는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박노자는 이 촛불집회를 복지 없는 신자유주의가 낳은 생활 불만의 폭발로 해석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 모델을 뒷받침하는 징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자민당은 의료보험과 연금 등 복지제도를 확대하면서 농민과 자영업자, 중산층을 체제 안에 묶었기 때문에 장기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 보수는 복지라는 안전판을 제공하지 않은 채 노동자와 자영업자를 시장의 경쟁에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따라서 한국형 신자유주의는 중산층을 해체하고 끊임없는 저항을 불러올 것이며, 진보정당이 그 불만을 복지동맹으로 조직한다면 한국은 장기 진보화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의 가장 큰 문제는 예측이 빗나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박노자는 복지 없는 불안정이 보수정권에 대한 불만을 낳는다는 사실에서, 그 불만이 진보정치의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너무 쉽게 건너갑니다.
일본 자민당에 대한 통찰
박노자의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단순한 국민성이나 선거기술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본 자민당이 1960년대 이후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의 적용범위를 넓히고, 노인 의료와 보육 등 사회적 안전판을 확대함으로써 농민과 자영업자, 중산층의 지지를 유지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관찰은 상당히 타당합니다.
보수정당도 장기간 집권하려면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불안을 줄이고, 자신의 지지기반이 시장경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정한 안전판을 제공해야 합니다.
박노자는 일본 보수가 단순히 복지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복지를 이용해 체제를 안정시키고 정치적 지지를 확장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통찰을 한국에 적용하는 순간 그의 분석은 경직됩니다.
일본 보수는 변할 수 있지만 한국 보수는 변할 수 없는가
박노자는 일본 자민당을 현실에 적응한 정치세력으로 설명합니다. 노동자층에서 지지가 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복지제도를 확대했고, 사회적 불안을 관리하며 장기집권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보수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는 한국 보수를 “오로지 기업의 단기적 이득만을 고려하는”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한국 보수는 복지를 확대하거나 사회적 타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에 그의 가장 독단적인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일본 보수에는 학습과 적응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보수에는 고정된 본질만 부여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당은 하나의 교리를 영원히 반복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선거에서 패배하고 유권자의 요구가 달라지면 정책을 수정합니다. 상대 정당의 의제를 흡수하기도 하고, 기존의 지지연합을 다시 구성하기도 합니다.
박노자는 일본 보수가 복지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보았지만, 한국 보수도 살아남기 위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한국 보수정당은 이후 복지정책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습니다. 기초연금, 무상보육, 사회보험 확대와 같은 정책은 진보정당만의 의제로 남지 않았습니다. 복지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공통의 정치의제가 됐습니다.
이 점에서 박노자는 보수정당을 살아 있는 정치조직이 아니라, 이미 역할이 정해진 계급집단처럼 다뤘습니다.
일본 보수는 현실에 따라 정책을 바꿀 수 있지만, 한국 보수는 본질적으로 반복지적이라는 구분에는 충분한 근거가 없습니다.
한국 보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다
박노자의 글에서 한국 보수는 독립적인 정치철학이라기보다 기업의 이익과 반복지 정책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이명박, 레이건, 대처, 고이즈미와 일본 자민당을 신자유주의와 기업주의라는 큰 범주 안에 함께 배치합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 자민당은 시장주의만을 추구한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농업과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공공사업을 지역에 배분하며, 관료제와 기업, 지역사회를 연결한 포괄정당이었습니다.
레이건과 대처는 시장주의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각국의 역사와 제도적 조건은 달랐습니다. 이명박 역시 개발주의와 기업경영식 행정이라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들을 모두 극우, 신자유주의, 기업주의라는 말로 묶으면 보수정치 내부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특히 한국 보수정당은 반공주의, 산업화, 시장경제, 지역연합, 관료집단과 자영업자 등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습니다. 단순히 대기업의 직접적인 정치대리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박노자는 보수정당이 재정 부담과 경제성장, 사회적 안정, 복지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습니다. 복지 확대에 신중한 태도도 모두 기업의 단기이익을 위한 반복지 정치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복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재정의 한계와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묻는 것은 독립적인 정치적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는 복지의 부정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복지의 규모, 재원, 대상과 장기적 효과입니다.
박노자의 범주에서는 이런 논쟁이 사라지고, 복지를 확대하면 사회적이며 복지를 제한하면 기업주의적이라는 단순한 구도만 남습니다.
정당의 장기집권과 사회의 보수화를 혼용하다
박노자가 말하는 ‘장기 보수화’의 중심 의미는 일본 자민당과 같은 보수정당의 장기집권입니다.
그러나 글이 진행될수록 정당의 장기집권, 신자유주의 정책, 기업주의 사회, 개인책임 의식과 민영화에 대한 태도가 하나의 ‘보수화’로 묶입니다.
이 개념들은 서로 관련될 수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보수정당이 장기집권하면서 복지를 확대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진보정당이 집권하면서 시장개방이나 민영화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유권자가 보수정당을 선택했다고 해서 모든 불평등을 개인의 능력 차이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복지를 지지하면서도 안보, 교육, 부동산과 문화적 가치 때문에 보수정당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의 집권 여부와 사회 전체의 가치관을 하나로 묶으면 선거 결과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2007년 이명박의 승리가 한국 사회 전체의 철학적 보수화를 증명하지 않았듯이, 2008년 촛불집회와 지지율 하락도 장기 보수화의 구조적 불가능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한 정권의 위기와 사회의 장기적 정치성향은 구분해야 합니다.
불만은 발생하지만 그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다
박노자의 핵심 전제 가운데 하나는 복지 없는 시장사회가 경제적 불안과 저항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자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용이 불안하고 노후와 의료, 보육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자영업 위기는 어느 정부에도 정치적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불만이 발생한다는 사실과 그 불만이 어느 정치세력으로 향하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사람은 복지 확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금과 사회보험료의 인하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조합을 약자의 보호조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정규직의 기득권 집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국가의 재분배를 요구할 수도 있지만, 부동산과 자산가치 보호를 더 중시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질서와 안보, 민족주의와 보호주의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박노자가 하나의 잠재적 복지동맹으로 묶은 집단들은 이해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고용안정과 사회보험 확대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세 자영업자는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규제, 사회보험료 부담을 경계할 수 있습니다.
농민은 국가보조와 시장보호를 요구할 수 있지만, 도시 노동자와 소비자는 낮은 식품가격을 원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피해를 공유한다고 해서 같은 정치연합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박노자는 마지막에 진보정당이 노동자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복지동맹을 구축한다면 장기 진보화가 가능하다고 조건을 붙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진보화를 필연이라고 단정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조건이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비정규직, 청년, 농민과 자영업자가 왜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하나의 복지동맹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경제적 불만이 있다는 사실에서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도출했지만, 그 사이에 필요한 정치적 조직과 설득, 이해관계의 조정 과정은 비어 있습니다.
이것이 박노자의 가장 치명적인 논리적 공백입니다.
박노자는 불만이 폭발하는 이유는 설명했지만, 그 불만이 왜 진보의 자산이 되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복합적인 촛불집회에서 하나의 의미만 읽어내다
2008년 촛불집회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광우병 위험에 관한 과장된 정보와 공포도 널리 유통됐습니다. 정부의 협상 과정과 소통 방식에 대한 불신, 반미감정, 대운하와 민영화에 대한 반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문화적 반감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촛불집회가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분명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정책 일부를 수정했고, 초기 국정운영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회의 직접적 동기와 참여자들의 장기적인 정치성향은 구분해야 합니다.
박노자는 이 복합적인 사건에서 복지 없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중산층의 생활정치적 저항이라는 의미를 중심적으로 추출했습니다.
그러한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민영화와 고용불안,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도 집회에 결합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규모가 곧바로 한국 중산층이 진보적 복지정치로 이동했다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박노자는 대규모 동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자신의 구조적 설명이 타당하다는 강한 징후로 받아들였지만, 동원의 직접적인 원인과 그 속에서 유통된 정보의 정확성은 충분히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진보 진영은 청소년과 청년층의 참여를 새로운 진보적 생활정치의 출현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청년세대가 그 정치적 방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당시 유통된 광우병 관련 과장 정보가 집단적 공포와 선동의 사례로 회고되기도 합니다.
이는 한 시점의 대규모 참여가 특정 세대의 장기적인 이념성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정치적 동원의 성공은 역사의 방향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예측은 어떻게 되었는가
박노자의 제목은 좁은 의미에서는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자민당과 같은 하나의 보수정당이 수십 년간 연속 집권하는 체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권교체가 반복됐고, 한국 정치는 일본보다 훨씬 경쟁적인 양당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박노자가 제시한 경로가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 보수정당은 복지 확대를 계속 거부하다가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지정책을 부분적으로 흡수하면서 변화했습니다.
비정규직, 청년과 자영업자가 진보정당의 안정적인 지지층이 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선거와 쟁점에 따라 보수와 진보 사이를 이동했습니다.
박노자가 기대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중심의 복지동맹도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복지 의제는 진보정당의 독점물이 되지 않았고, 거대 양당이 함께 경쟁하는 의제가 됐습니다.
촛불집회 역시 노동자와 청년을 결합한 장기 진보화의 제도적 기반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일본식 장기 보수집권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결론과, 박노자가 제시한 설명은 분리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결론이 일부 맞았다고 해서 그 논증까지 맞는 것은 아닙니다.
박노자가 놓친 것
박노자는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복지와 사회적 타협을 통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통찰을 한국에 적용하면서 한국 보수의 학습 가능성을 배제하고, 경제적 불만이 진보적 복지동맹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했습니다.
촛불집회는 한국 사회에 불만이 축적됐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불만의 존재와 불만의 정치적 방향은 다른 문제입니다.
불안한 청년과 자영업자는 복지를 요구할 수도 있지만 감세, 자산 보호, 질서와 안보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경제적 불안을 겪는다고 해서 같은 정당을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당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본 보수가 복지를 받아들였듯이 한국 보수도 유권자의 요구에 따라 정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진보정당도 시장정책을 수용할 수 있고, 보수정당도 복지국가의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박노자의 글은 구조를 강조하지만, 실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당과 유권자의 학습 능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의 글에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로지 기업의 단기적 이득만을 고려한다”, “중산계층 중심의 사회가 전반적으로 해체된다”는 식의 단정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분석의 강도보다 확신의 강도를 보여줍니다.
한국 보수가 앞으로도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경제적 불안이 진보정당에 유리하게 조직될 것이라는 기대, 촛불집회의 열기가 장기적인 진보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해석은 모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주장입니다.
박노자는 이를 충분히 논증하기보다 자신의 모델 안에서 자연스러운 결론처럼 제시합니다.
결론
박노자의 「한국의 장기 보수화는 없다」는 당시 한국 사회의 불안과 이명박 정부의 위기를 날카롭게 포착한 글입니다.
한국의 복지제도가 취약했고, 고용불안과 노후·의료·보육의 부담이 대중의 불만을 키웠다는 지적은 유효했습니다. 일본 보수의 장기집권이 복지와 사회적 타협을 통해 가능했다는 관찰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통찰을 한국 보수에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보수는 복지를 통해 학습하고 적응할 수 있었지만, 한국 보수는 기업의 단기이익만을 추구하는 고정된 세력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또한 경제적 불만이 왜 진보정당의 복지동맹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불만이 생긴다는 것과 그 불만이 진보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박노자는 불만의 원인은 설명했지만 불만의 방향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놓친 것은 한국에서 장기 보수화가 가능한가라는 미래의 정답만이 아닙니다.
정당과 유권자는 고정된 계급 모형보다 훨씬 빠르게 학습하고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문헌
박노자, 「한국의 장기 보수화는 없다」, 《한겨레2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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