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억압적 관용’
오늘날 대학이나 언론에서 보수적인 연사를 초청하면 종종 이상한 논리가 등장합니다. “모든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혐오를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서는 안 됩니다”, “억압자에게 발언 기회를 주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폭력에 가담하는 일입니다”라는 식입니다. 이 주장은 얼핏 보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상식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과거의 자유주의자는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반면 새로운 급진주의자는 자신이 피해자와 해방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장 노골적으로 이론화한 인물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입니다.
마르쿠제는 1965년 발표한 「억압적 관용」에서 모든 의견을 똑같이 허용하는 관용이 오히려 억압적인 사회를 유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우파의 주장에 대한 관용을 철회하고 좌파의 주장에는 관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관용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니며, 누구의 의견을 허용하고 누구의 의견을 억제할지를 정치적 목적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철학자
마르쿠제는 1898년 독일 베를린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복무했고, 전쟁 뒤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한때 마르틴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독일에서 학문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워졌고,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합류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 정보기관인 전략정보국(OSS)에서 나치 독일을 분석하는 업무에도 참여했습니다. 전쟁 후에는 브랜다이스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에서 가르쳤으며, 1960년대 미국과 서독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특히 1960년대 신좌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바이마르공화국의 붕괴와 나치 집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마르쿠제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나치의 등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나치는 선거에 참여했고, 집회를 열었으며, 표현의 자유와 정당 활동의 자유를 이용하여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그 자유를 모두 폐지했습니다. 이 경험에서 마르쿠제가 얻은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적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면, 그 자유를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틀리지 않으며, 실제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전체주의 정당이나 폭력조직을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방어적 민주주의’ 논의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여기에서 너무 멀리 나아갔습니다. 그는 나치와 같은 명백한 전체주의 운동에만 예외를 적용하지 않았으며, 기존 사회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견해와 우파의 정책 일반을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나치에 대한 불관용이 어느새 우파에 대한 불관용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혁명하지 않는 이유
마르쿠제의 사상을 만든 또 하나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예측이 현실과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는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깨달아 혁명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서유럽과 미국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노동조합과 복지제도에 편입됐으며, 반드시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하지도 않았습니다.
경험적인 태도라면 이 결과를 보고 이론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생활을 반드시 악화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 노동자들이 혁명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반대로 해석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좋은 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의식과 욕망까지 지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선진 산업사회가 단순한 폭력이나 강압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광고, 소비, 오락, 기술과 대중문화를 통해 사람들이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동차와 텔레비전을 원하고, 더 나은 임금과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는 것도 그들의 진정한 욕구가 아니며, 사회가 만들어낸 ‘허위 욕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쿠제는 인간의 해방이 허위 욕구를 진정한 욕구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때부터 마르쿠제의 이론은 현실에 의해 반박되기 어려워집니다. 노동자가 혁명에 참여하면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는 증거가 되고,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지지하면 자본주의에 의해 의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이론은 틀리지 않습니다. 당사자의 선택은 더 이상 존중할 만한 경험적 사실이 아닙니다. 이론가가 이미 당사자의 ‘진정한 욕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모를 수 있다
마르쿠제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매우 특이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생활에 만족하지만 그것은 허위의 만족일 수 있고, 여성은 전통적인 가정생활을 선택하지만 그것은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결과일 수 있으며, 시민은 보수정당에 투표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언론에 의해 의식이 조작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진정한 이익을 이해하는 사람은 피해자 자신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이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강한 지적 오만이 숨어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대중이 소비사회와 언론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급진적 지식인 역시 이념과 시대 분위기, 집단적 욕망에 의해 판단이 왜곡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은 틀릴 수 있지만, 지식인은 해방의 방향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관용이 억압이 되는 순간
마르쿠제의 대표적인 논문 「억압적 관용」은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일반적인 자유주의 사회는 서로 다른 의견에 동등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려고 하지만, 마르쿠제는 이런 형식적 평등이 현실에서는 기존 권력에 유리하게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대형 언론사와 작은 반전단체에 똑같이 발언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서 실제 영향력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며, 기업과 정부는 막대한 자금과 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소수의 저항운동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를 똑같이 관용하는 것은 겉으로만 중립적일 뿐, 실제로는 기존의 불평등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까지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돈과 조직, 언론 접근성이 전혀 다른 집단이 완전히 평등한 조건에서 경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소수 집단의 발언 기회를 더 보장하자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기존의 정책과 태도, 의견에 불관용을 적용하고 억압받는 급진적 의견에는 관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그는 우파 운동에 대한 관용의 철회와 좌파 운동에 대한 관용을 명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마르쿠제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기존 사회는 이미 억압적이며, 기존 사회를 지지하는 말은 억압을 강화하므로, 그런 말에 대한 관용은 중립이 아니라 억압에 대한 협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관용을 실현하려면 억압적인 의견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관용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과거의 관용은 내가 싫어하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의견도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원칙이었으나, 마르쿠제의 관용은 해방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허용하고 억압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억제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차별적 관용"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해방과 억압을 판정하는가
마르쿠제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어떤 의견이 해방적이고 어떤 의견이 억압적인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마르쿠제에게는 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기존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우파의 견해는 억압적이고, 그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좌파의 견해는 해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증명된 결론이 아닙니다. 마르쿠제 자신도 자신의 주장이 달성하려는 급진적 목적을 미리 전제한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는 관용이 이미 실현되어 있다는 사회의 믿음에 맞서기 위해 이런 순환적인 전제를 사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논리의 시작과 끝은 같습니다. 좌파의 목표는 해방적이고, 그러므로 좌파에 반대하는 주장은 억압적이며, 억압적 주장은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왜 좌파의 목표가 해방적인지를 묻는 사람은 이미 억압적인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반론이 불가능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론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만큼 사회의 의식 조작이 심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의 이름을 빌린 지식인의 권력
마르쿠제의 사상은 노동자, 흑인, 여성, 식민지 주민과 사회적 소수자의 해방을 주장하기 때문에 피해자를 위한 철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서 실제로 판단권을 갖는 사람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피해자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이 이론과 맞지 않으면 허위의식이나 내면화된 억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실제 목소리보다 피해자의 진정한 이익을 해석하는 지식인의 목소리가 우위에 놓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피해자가 도덕적 정당성의 원천이 되고, 지식인이 그 정당성을 사용하는 권력자가 됩니다.
피해자의 고통은 지식인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지식인은 피해자를 대신한다는 이유로 절차적 제약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마르쿠제 이후 급진적 정치에서 반복되는 가장 위험한 패턴입니다. 어떤 집단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그 집단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반대 의견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사람은 피해를 부정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 결과 토론과 검증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위가 됩니다.
“실제로 피해가 얼마나 발생했는가?”, “제안한 정책이 피해를 줄이는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피해를 만들지는 않는가?”, “당사자들은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와 같은 질문조차 피해자의 고통을 의심하는 행위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강해질수록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는 오히려 약해지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에서 혐오표현으로
오늘날 마르쿠제의 글을 직접 읽은 사람은 많지 않으며, 대학의 학생운동가나 언론인이 모두 「억압적 관용」을 읽고 행동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방식은 여러 형태로 살아남았습니다. “중립은 현상 유지의 편입니다”, “침묵은 폭력에 대한 동조입니다”, “혐오표현은 의견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억압자에게 플랫폼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의 발언을 막는 것은 검열이 아니라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입니다”라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이 문장들이 모두 마르쿠제에게서 직접 나온 것은 아니며, 포스트구조주의, 급진적 페미니즘, 비판법학, 비판인종이론과 정체성 정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 놓인 논리에는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절차를 적용하는 것이 실제로는 억압을 강화할 수 있으므로, 피해자와 해방의 편에는 더 많은 권리를 주고 반대편에는 더 적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논리가 받아들여지면 좌우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좌파의 폭력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 되고 우파의 폭력은 권위주의가 되며, 좌파의 검열은 피해자 보호가 되고 우파의 검열은 표현의 자유 침해가 됩니다. 좌파의 집단행동은 시민불복종이 되고 우파의 집단행동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 마르쿠제의 이론에서 좌우는 같은 도덕규칙 아래 놓이지 않으며, 서로 다른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쿠제가 보지 못한 것
마르쿠제의 가장 큰 오류는 사회에 억압이 존재한다고 말한 데 있지 않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여론에 영향을 주고, 광고와 선전이 인간의 욕망을 바꾸며, 형식적 자유가 언제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충분히 타당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마르쿠제는 사람들이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더 강한 공개 검증과 권력 분산을 요구하지 않고, 대신 해방의 방향을 아는 지식인이 의견의 허용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대중의 오류 가능성은 정확하게 보았지만 지식인의 오류 가능성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했습니다.
역사는 지식인이 대중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육받은 사람들은 더 복잡한 논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편견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내가 싫다”고 말하지만, 지식인은 “역사의 진보와 피해자의 해방을 위해 당신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말합니다. 억압은 무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진실과 정의를 알고 있다는 지적 확신에서도 나옵니다.
자유주의의 절차는 약자를 외면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마르쿠제의 관점에서 법적 중립과 표현의 자유는 기존 권력을 보호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절차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옳은지,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지, 어떤 정책이 장기적으로 더 큰 피해를 만드는지를 권력자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모든 의견이 가치 있기 때문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잘못된 의견을 가려낼 권한을 한 집단이 독점할 때 발생하는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보장됩니다. 동일한 절차는 사회적 차이를 모른 척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자신을 피해자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똑같이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장치입니다.
경험주의자는 피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정책이 피해를 줄이는지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는 목적만큼 수단도 중요합니다. 피해를 줄이겠다는 정책이 실제로 피해를 늘릴 수도 있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규제가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 수도 있으며, 피해자를 대표한다는 단체가 피해자의 의사와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으므로, 경험주의는 피해자의 이름을 들었을 때 질문을 멈추는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하게 묻는 태도입니다.
마르쿠제가 남긴 역설
마르쿠제는 자유주의 사회가 얼마나 쉽게 자기만족에 빠지는지를 비판했으며, 소비와 오락에 만족한 시민이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모든 의견을 똑같이 대하는 관용이 기존 질서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의 결함을 발견한 뒤 자유주의를 개선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진영에 더 많은 판단권을 부여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진실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도 더 많은 검증과 논쟁을 요구하지 않고,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검열의 권리를 주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마르쿠제는 자유주의의 적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중이 언제나 현명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쿠제처럼 뛰어난 지식인조차 자신의 도덕적 확신 속에서 위험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목적이 절차를 무시할 권리를 주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현대 정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공개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은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구하려 할 뿐이라고 믿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연결된 논의: 동물은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가
마르쿠제의 논리는 인간 사회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스스로 말할 수 없다고 가정할수록,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의 권력은 커집니다. 그런 점에서 동물권은 마르쿠제적 사고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동물은 투표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말하지 못하며, 인간 사회의 정책 결과를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피해자로 규정한 사람은 동물의 의사를 거의 제한 없이 대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물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동물에게 물을 수 없으며, 어떤 사육 방식이 동물에게 더 좋은지, 인간과 함께 사는 것이 착취인지 공생인지, 야생의 고통과 인간의 보호 중 어느 것이 나은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결국 인간입니다.
자신이 동물을 대표한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인간의 자유와 생업을 제한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권력 행사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피해자를 위한 해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피해자가 자신의 억압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고 보았고, 동물권 운동에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억압을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물의 해방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 검증받아야 할까요. 이 문제는 추후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