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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와 피해자의 정치 그리고 혐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마르쿠제의 억압적 관용 논리가 현대 미국의 피해 정체성 및 혐오 담론과 결합하며 공론장을 왜곡하는 구조를 분석합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피해자의 정치 그리고 혐오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혐오’입니다. 인종이나 성별, 가족에 관한 발언부터 이민정책에 대한 반대, 종교적 신념의 표현, 대학 강연, 영화의 대사까지 모두 혐오라는 이름으로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물론 특정 집단을 열등하게 취급하거나 폭력을 선동하는 실제 혐오는 존재하며, 미국 헌법도 폭력 선동 등은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에서 제외하지만, 정부가 단순히 불쾌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의견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보호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 미국에서 혐오라는 말은 법적 개념보다 훨씬 넓게 사용됩니다. 폭력을 선동하지 않았더라도 특정 집단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거나, 발언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기존 권력관계를 강화한다고 해석되면 혐오라 불립니다. 정책 반대조차 상대 집단의 존재 부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혐오의 기준이 실제 증오와 폭력에서 "피해자가 경험한 불쾌감과 배제감"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 변화의 모든 책임을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돌릴 수는 없지만, 현대 혐오문화의 기본 문법을 이해하려면 이들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사회를 의견이 다른 시민들의 공론장이 아니라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관계"로 해석하는 틀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과 해방하는 이론

1920년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노동자가 혁명하지 않고 자본주의 문화에 적응하는 현실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지배가 경제뿐만 아니라 가족, 교육, 대중문화, 언론, 언어 등을 통해 심리적·문화적으로 재구성된다고 보고 분석 영역을 넓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지배관계를 드러내고 인간을 예속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비판이론’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구조적 억압을 드러낸다는 매력을 지니지만, 문제는 해방을 지향하는 이론이 누가 억압받고 무엇이 해방인가를 미리 규정해 버릴 때 발생합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억압을 모를 수도 있다

비판이론은 당사자가 스스로 억압받는다고 느끼지 않아도 억압이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노동자가 직장에 만족하거나 여성이 전통 가족을 선호해도 체제 종속이나 가부장제 내면화의 결과로 해석하는 식입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환자의 부정이 억압의 증거가 되듯, 이론에 동의하면 해방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억압을 깨닫지 못한 거짓 의식으로 치부됩니다.

비판이론이 만든 "억압과 해방의 도식"에 따르면 사회적 갈등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억압관계가 되며, 억압받는 집단의 요구는 해방의 요구가 되고 반대 주장은 억압을 유지하려는 악한 행위로 단죄됩니다.

마르쿠제의 ‘억압적 관용’

이 연결을 가장 분명하게 만든 사상가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입니다. 그는 1965년 「억압적 관용」에서 중립적 관용이 이미 지배세력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질서를 유지시킨다고 주장하며, 진정한 해방을 위해 지배적 정책과 우파 운동에 불관용하고 좌파 운동에는 관용해야 한다는 ‘해방적 관용’을 제안했습니다.

이 논리는 표현을 내용이 아닌 발언자의 위치, 대상, 권력관계 강화 여부에 따라 판단하게 만듭니다. 강자의 공격은 억압이지만 약자의 공격은 저항이며, 우파의 불관용은 지배지만 좌파의 불관용은 해방이라는 비대칭적 기준이 적용되면서,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 자유주의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민권운동과 피해 경험의 등장

미국의 민권운동과 여성운동은 겉으로 중립적인 제도가 낳는 실제 차별과 소수자의 피해 경험을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왔습니다. 이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이들의 증언을 듣는 것은 보지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경험을 경청하는 차원을 넘어, 피해자의 주관적 해석에 최종적인 정치적·도덕적 판정권을 부여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피해 경험에서 피해 정체성으로

민권운동의 피해가 투표권 박탈, 고용 차별, 폭력 등 구체적 증거로 확인되는 것이었다면, 정체성 정치가 발전하면서 피해의 개념은 불쾌감, 배제감, 정체성 부정 느낌으로 넓어졌습니다. 개인은 억압받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 무례한 말이나 불쾌한 농담, 정책 반대조차 사회 전체 억압구조의 표현으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조적 억압 개념과 정체성 정치가 결합하면서 피해자의 주관적 불쾌감은 곧 사회구조의 진실을 증명하는 절대적 거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피해자라고 느끼면

누군가 자신을 억압받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불쾌감을 느끼면, 발언자의 의도나 맥락과 상관없이 상대의 발언은 곧바로 ‘억압을 재생산한 혐오’로 규정됩니다. 미워하지 않는다거나 정책 부작용을 우려했을 뿐이라는 해명도 특권을 깨닫지 못했거나 혐오가 깊다는 증거로 해석될 뿐입니다.

상대의 동의든 부정이든 모두 가해의 증거로 삼는 이 구조는 반증 불가능한 사이비 심리치료와 같아서 공론장의 건설적 대화를 파괴합니다.

불쾌감과 혐오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주관적 감정이 실제라 해서 상대방이 혐오를 표현했다는 판단이 자동으로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불쾌감, 모욕, 사실 오류, 정책 반대, 권리 충돌은 혐오와 엄연히 다릅니다. 종교적 신념이나 이민 제한론, 전통적 가족관이 누군가에게 배제감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인간 말살이나 폭력 선동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쪽이 자신의 요구를 해방으로, 반대자의 말을 혐오로 규정하면 정책의 효과나 현실적 타당성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반대자의 인격에 대한 심판만 남게 됩니다.

혐오라는 말이 남용되는 과정

혐오는 증오와 폭력 선동에서 출발해 모욕, 고정관념 표현, 불평등 유지 주장, 나아가 불편한 반대 의견 전체로 범위가 확산되었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혐오는 발언 내용의 객관적 특성이 아니라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경험에 의해 결정됩니다.

문제는 누구나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패배한 정치 집단, 종교인, 노동자, 다수자와 소수자 모두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상황에서 피해 의식만으로 혐오를 판정한다면 모든 반대 의견이 혐오가 되는 무한한 억압이 발생합니다.

혐오를 비판하며 혐오를 생산하다

혐오에 맞서는 운동이 상대를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혐오주의자로 단죄하며 직장 해고, 강연 취소, 온라인 매장 등 사회적 추방을 요구하는 새로운 혐오를 생산합니다.

자신들의 불관용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자 정의로운 분노로 정당화하는 순간, 혐오에 대한 보편적 기준은 사라지고 도덕적 면허를 얻은 새로운 공격성만 남게 됩니다.

미국의 역설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보호하는 미국에서 이러한 혐오문화는 정부의 법적 처벌이 아니라 대학, 기업, 언론, 소셜미디어 등 사적·문화적 영역을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마르쿠제가 말한 해방적 불관용이 민간 조직과 문화를 통해 구현된 셈이며, 법적 자유는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자율적 검열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모든 것을 만들었는가

아도르노나 하버마스 등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상가들이 현대의 취소문화나 정체성 정치를 직접 설계한 것은 아니며, 하버마스는 오히려 공개적 토론과 의사소통적 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억압과 해방 구도로 읽고 관용의 비대칭성을 정당화한 이들의 사상적 유산이 정체성 정치와 결합하면서, 피해 감정이 상대의 발언을 혐오로 낙인찍는 강력한 문법을 제공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경험주의자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경험주의자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청취하되, 상처받았다는 느낌만으로 상대의 의도와 도덕성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발언 내용, 차별 행위 유무, 맥락과 결과, 기준의 보편성을 엄격히 조사합니다. 느낌은 조사해야 할 중요한 자료일 뿐 판결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증인이지만 판사는 아닙니다

피해자는 사건을 증언하는 귀중한 증인이지만, 스스로 유죄를 선고하는 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상처받았다"는 말은 존중되어야 하나 그것이 자동으로 상대의 혐오를 입증하지는 않으며, 증거와 절차라는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혐오라는 말이 힘을 잃는 순간

혐오라는 단어가 무례한 농담, 정책 비판, 불쾌한 의견 모두에 남용되면 정작 폭력 선동이나 실제 인종 혐오 같은 치명적 악을 가리키는 힘을 잃게 됩니다. 개념의 무분별한 확장은 사회적 경계심을 무디게 만들 뿐입니다.

해방의 언어가 심판의 언어가 될 때

사회의 보이지 않는 지배를 비판하던 해방의 언어가, 누가 피해자이고 어떤 의견이 혐오인지 결정하는 지적 권력으로 변질될 때 비판이론은 또 다른 지배 도구가 됩니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반대자의 입을 막는 심판의 언어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혐오문화의 시작

사회를 억압자와 피해자로 나누고 피해자의 요구만 해방으로 간주하며 반대 의견을 혐오로 배제하는 문법은 공론장을 파괴합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 감정에 상대방을 심판할 무제한의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불편하게 한 말과 비인간화한 말을 구분하고 정책 반대와 집단 증오를 구별하는 경험적 엄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느끼는 순간 상대를 혐오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면 사회에는 시민이 사라지고 오직 피해자만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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