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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주의는 정말 세계의 미래인가


엘리자베스 체리의 《Culture and Activism》을 바탕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동물권 운동을 비교하고, 비건주의가 인류 전체의 필연적 미래가 아니라 미국 리버럴 문화의 특수한 현상임을 고찰합니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전통 식탁과 현대 도시의 비건 광고판을 대조한 상징적 일러스트

비건주의는 흔히 미래의 윤리적 식생활처럼 소개됩니다. 육류 소비를 줄이고, 동물의 고통을 없애며, 환경까지 보호하는 생활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대학, 언론, 문화산업에서는 비건주의가 이미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건주의가 정말 세계 전체가 자연스럽게 수렴하고 있는 미래인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비건주의는 미국과 영국의 특정한 사회집단에서 성장한 윤리운동이며, 세계 여러 문화가 이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엘리자베스 체리의 《Culture and Activism》은 이러한 차이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미국과 프랑스의 동물권 운동을 비교하며, 미국에서는 동물권 운동과 비건주의가 성장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큰 영향력을 얻지 못한 이유를 분석합니다. 저자는 미국 운동이 건강, 환경, 종교, 미디어와 유명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반면, 프랑스 운동은 철학적 일관성을 중시하여 대중적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책의 자료를 조금 다르게 읽으면, 미국이 더 실용적이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가 인간과 문화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물성 식단과 비건주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식물성 식품을 많이 먹는 것과 비건주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한국의 전통 식단은 채소, 곡류, 콩, 나물과 발효식품의 비중이 높습니다. 육류가 매 끼니의 중심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전통 식문화는 비건이 아닙니다. 김치에는 흔히 새우젓이나 멸치액젓이 들어가며, 국과 찌개에는 멸치육수와 고기국물이 사용됩니다. 나물에도 육수나 동물성 양념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건주의자는 새우젓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습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직접 먹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물성 재료가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면 원칙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채식 위주의 식단은 음식의 비중에 관한 문제이지만, 비건주의는 동물을 이용하는 행위 자체에 관한 윤리적 원칙입니다.

채소를 더 많이 먹고 육류를 줄이는 것은 건강이나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건주의는 우유, 치즈, 달걀, 생선, 꿀, 젓갈뿐 아니라 가죽제품과 동물실험 제품까지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단순한 식단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시 규정하려는 철학인 것입니다.

미국의 성공이 세계적 성공은 아닙니다

《Culture and Activism》은 현대 동물권 운동이 1980년대 이후 농장동물과 비건주의를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미국에서는 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약해졌다고 설명합니다. 미국의 동물권 단체들은 공장식 축산, 채식과 비건 홍보에 자원을 집중했고, 기업정책과 법률을 변화시키는 데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비건주의가 눈에 잘 띈다는 사실을 세계적 확산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서도 비건주의는 국민 전체의 합의가 아닙니다. 주로 도시의 대학문화, 환경운동, 유명인 산업, 진보적 언론과 소비자운동 안에서 강한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미국 보수주의자와 농촌지역, 목축과 사냥문화에서는 비건주의에 대한 반감도 강합니다.

즉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은 사회 전체가 비건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미국 리버럴 문화의 일부가 대학·언론·기업을 통해 높은 가시성을 얻은 것에 가깝습니다.

비건 식품이 슈퍼마켓에 많이 진열되고 유명인이 비건 선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류 전체의 문화적 방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문화산업이 세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미국 일부 계층의 생활양식이 세계의 미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왜 비건주의에 저항했습니까

체리의 책에서 프랑스는 동물을 싫어하는 사회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프랑스는 반려동물을 매우 사랑하며, 유럽에서도 반려동물 보유 비율이 높은 나라로 소개됩니다. 개는 식당과 대중교통에도 자연스럽게 동행합니다.

그런데도 프랑스인은 비건주의에는 냉담했습니다.

그 이유는 프랑스인에게 동물이 단순히 보호해야 할 추상적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가족이기도 하지만 음식이기도 하며, 농업과 사냥, 지역축제와 미식문화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푸아그라와 투우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 책은 프랑스 법이 푸아그라를 문화적·미식적 전통으로 명시하고, 오랜 지역 전통이 있는 투우와 투계에는 동물학대 규정의 예외를 두었다고 설명합니다.

동물권 운동가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문화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역사와 음식문화가 외부의 추상적 윤리원칙에 의해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상황입니다.

프랑스인이 비건주의를 거부한 것은 반드시 동물의 고통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동물과 함께 살아오며 형성한 문화 전체를 동물 착취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재판하는 것에 저항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 역시 animality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자연 밖에 서서 자신의 생활을 처음부터 설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 역시 동물이며, 먹고 번식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가축을 길들이고, 사냥하고, 우유와 고기와 가죽을 사용하며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동물성과 육체적 삶을 animality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 비판(《동물해방》은 왜 동물성마저 놓쳤는가)이나 동물권과 인권의 윤리적 경계를 다룬 논의에서 보듯, 인간은 공평한 계산표 위의 외계인이 아니며 고통과 선호만을 담은 추상적 개체도 아닙니다.

프랑스의 육식문화는 단순히 고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아닙니다. 인간이 동물과 맺어온 관계가 음식, 지역, 가족, 축제와 결합한 문화입니다. 그 문화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살아온 역사를 무시하고 쉽게 미개하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비건주의는 동물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일부 비건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animality를 이성적 원칙으로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맺어온 관계를 모두 잘못된 과거로 보고, 새로운 윤리체계에 따라 생활문화를 다시 설계하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보수주의와 리버럴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보수주의는 전통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 형성된 문화에는 개인의 이성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경험과 적응이 축적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전통을 수정하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과 공동체를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반면 현대 리버럴 운동은 보편적 윤리원칙에 맞지 않는 전통을 적극적으로 재설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원칙에서 출발해 육식, 낙농, 사냥, 동물실험과 전통음식을 하나의 착취 구조로 묶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이 원칙이 세계 모든 문화에 동일하게 적용될 때 발생합니다. 프랑스의 치즈와 푸아그라, 한국의 젓갈과 김치, 북방 목축민의 유제품과 육류문화까지 모두 도덕적 교정의 대상이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어린이 채식이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프랑스 문화가 비건주의를 얼마나 낯설게 받아들였는지는 어린이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체리의 책에 등장하는 프랑스 채식주의 단체 관계자는 자신의 단체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채식주의를 홍보할 수 없었고, 어린이용 자료도 만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어린이 채식이 종교집단이나 위험한 컬트와 연관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인에게 육류를 먹지 않는 생활은 단순한 식단 선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거부하는 극단적 신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정확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 법이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채식을 시키는 행위 자체를 일률적으로 금지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책이 보여주는 것은 프랑스 채식단체가 사회적 반발과 컬트 의혹 때문에 어린이에게 채식을 홍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를 “프랑스에서는 어린이 채식이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쓰면 책의 근거를 넘어갑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어린이에게 채식주의를 교육하거나 권하는 행위가 정상적인 영양교육이라기보다 위험한 이념적 강요로 받아들여졌고, 채식단체조차 어린이 대상 홍보를 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프랑스 특유의 국가적 영양관과 교육관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린이의 식사는 부모가 자신의 철학을 실험하는 영역이 아니라, 성장에 필요한 다양한 식품을 제공해야 하는 공적 문제로 인식된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과학적으로 옳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충분히 계획된 식물성 식단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영양학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가 성인의 개인적 선택과 어린이에게 강요되는 생활규범을 다르게 보았다는 점입니다.

아이에게 특정한 윤리철학을 이유로 음식 전체를 금지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아이는 부모의 철학을 검토하거나 거부할 능력이 없으며, 성장과 사회생활의 결과도 스스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동물권이라는 선한 목적이 있더라도 어린이에게 엄격한 비건 식단을 강요하는 문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합니다.

비건주의는 좌파 내부에서도 합의된 철학이 아닙니다

비건주의를 진보주의 전체의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전통적인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비건주의를 도시 중산층의 생활양식 정치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축산업 종사자와 농민의 생계, 저소득층의 식품 선택, 지역 음식문화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량주권 운동이나 원주민 운동 역시 모든 동물 이용을 착취로 규정하는 주장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특정한 생태환경에서 목축, 사냥, 어업으로 살아온 공동체의 문화를 서구 도시인의 윤리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문화적 지배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건주의는 좌파 전체가 합의한 철학도 아니며, 미국 리버럴 내부에서도 논쟁적인 입장입니다. 다만 언론과 대학, 유명인 문화에서 강한 목소리를 얻었기 때문에 보다 보편적인 가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동물권 운동은 정말 실용적이었습니까

체리는 미국 동물권 운동이 프랑스보다 실용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미국 운동가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비건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육류 섭취를 조금 줄이거나 기업의 사육환경을 개선하는 단계적 목표도 받아들였습니다.

책에는 미국의 Vegan Outreach가 ‘Why Vegan?’이라는 전단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전단 제목에서 비건이라는 단어를 빼고, 육류를 좋아하더라도 동물성 식품을 조금씩 줄일 수 있다는 방식으로 캠페인을 바꾼 사례가 나옵니다. 운동가는 비건주의가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어야 하는 불가능한 생활처럼 보이지 않도록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이것은 전술적으로는 실용적입니다. 그러나 운동의 최종 목적까지 실용적인 것은 아닙니다.

동물 이용의 전면적 폐지를 목표로 하면서,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단계적 전략을 채택한 것입니다. 방법은 유연하지만 목적은 여전히 급진적입니다. 따라서 미국 동물권 운동의 성과를 단순히 실용주의의 승리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사회 전체를 설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지원하는 대학·언론·비영리단체·유명인과 리버럴 소비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동물권 운동은 세계 보편의 가치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문화적 환경에서 한 운동이 큰 영향력을 얻은 사례일 수 있습니다.

세계의 미래는 하나일 필요가 없습니다

동물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타당합니다. 공장식 축산의 잔혹성을 개선하고, 과도한 육류 소비를 줄이며, 불필요한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가 반드시 전 인류의 비건화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채식 위주의 식단을 선택하면서도 젓갈이 들어간 김치를 먹을 수 있습니다. 육류 소비를 줄이면서도 지역의 치즈와 달걀을 먹을 수 있습니다. 동물복지를 강화하면서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 전체를 착취로 규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건주의는 여러 윤리적 선택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세계사의 필연적 미래로 제시하는 순간, 다른 문화는 뒤처진 과거가 되고 맙니다.

프랑스인의 저항은 단순한 후진성이 아닙니다. 인간도 동물이며, 인간이 동물과 함께 형성한 문화 역시 가볍게 폐기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음식이 새우젓 한 숟갈 때문에 비윤리적인 음식으로 판정된다면, 우리는 그 판단의 기준이 정말 보편적인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비건주의가 세계의 미래가 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더 현실적인 미래는 각 문화가 자신의 음식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식물성 식품의 비중을 높이며, 지나친 축산과 소비를 조정하는 방향일 것입니다.

세계의 미래는 하나의 식단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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