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에서 ‘신과학’이라는 말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기존 서양 과학은 자연을 기계처럼 분해하지만, 양자역학과 현대 생물학은 우주가 연결된 하나의 전체임을 보여준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신과학에는 생태계의 상호작용, 시스템 이론, 비선형 현상과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처럼 충분히 논의할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과학과 철학적 해석, 종교적 믿음이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묶이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양자역학과 복잡계 이론이 초능력, 기, 정신치유와 대체의학에까지 권위를 빌려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초자연적 현상을 주장하는 사람이 기적이나 신비한 힘을 말했습니다. 신과학 이후 같은 주장은 ‘양자’, ‘에너지’, ‘파동’, ‘장’, ‘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언어가 종교에서 과학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과학이 아니라 뉴에이지 과학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신과학’이라고 불린 것은 대체로 New Age Science, 즉 뉴에이지 과학이었습니다. 여기서 뉴에이지는 단순히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명상, 점성술, 영성, 초심리학, 인간잠재력운동과 대체의학을 포괄한 서구의 문화운동을 가리킵니다.
뉴에이지 저술가들은 불확정성,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측정 문제와 양자 얽힘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언어를 발견했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무너졌고, 관찰자의 의식이 현실을 만들며, 동양 신비주의가 현대물리학에 의해 확인됐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New Age Science가 ‘뉴에이지 과학’이 아니라 “신과학”으로 번역됐습니다. 뉴에이지 과학이라고 했다면 하나의 영적·문화적 운동으로 보였겠지만, 신과학이라고 부르자 낡은 과학을 대신할 차세대 과학혁명처럼 보였습니다. 강건일의 《신과학은 없다》가 이 번역에서 생긴 착시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 담론을 확산시킨 중요한 매개는 범양사의 신과학총서였습니다. 총서 제1권인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은 현대물리학과 힌두교·불교·도교의 신비주의 사이에 세계관적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상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 문제는 대중적 수용 과정에서 ‘유사하다’가 ‘동일하다’로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물리학과 동양 신비주의에는 비슷한 표현이 있다.
→ 동양의 현자들은 이미 양자역학을 알고 있었다.
→ 동양의 기와 물리학의 에너지는 같은 것이다.
→ 명상과 초능력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자역학, 생태학, 불교, 기, 의식의 확장과 초심리학은 동일한 증거 수준을 가진 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의 총서와 세계관 안에 함께 놓이면서 실제 과학이 초자연적 믿음에 권위를 빌려주는 효과가 생겼습니다.
‘관찰자’와 양자 얽힘은 의식의 힘이 아닙니다
신과학에서 가장 많이 오용된 개념은 양자역학의 ‘관찰자’였습니다. 측정하기 전의 상태를 여러 가능성의 중첩으로 표현하고 측정하면 특정 결과를 얻는다는 설명이, 인간의 의식이 현실을 선택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측정은 반드시 인간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리계가 측정 장치나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그 결과가 기록되는 과정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측정 문제의 철학적 해석에는 여전히 논쟁이 있지만, 의식이 외부 현실을 창조하거나 질병을 치료한다는 결론은 양자역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양자 얽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얽힌 계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밀하게 정의된 양자 상태와 측정 결과의 관계이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얽힘으로 빛보다 빠른 신호를 보낼 수도 없습니다.
입자의 상관관계에서 텔레파시와 원격치유로 넘어가려면 별도의 실험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양자세계에는 상식 밖의 현상이 있다’는 사실은 특정한 초능력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기와 초능력은 과학 용어로 이름만 바뀌었습니다
전통 동양사상의 기는 우주의 구성 원리, 생명력, 호흡, 기운이나 신체 상태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반면 물리학의 에너지는 수학적 정의와 측정 단위를 가지며 에너지 보존법칙의 적용을 받습니다.
신과학 담론은 두 개념이 모두 변화와 운동을 설명한다는 이유로 같은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기는 미세한 에너지이며, 기공 수련자가 이를 모아 방출하고 치료자는 환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정말 물리적 에너지라면 어디서 발생하고 어떤 형태로 얼마나 전달되며 무엇에 작용하는지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측정되지 않으면 현대 장비가 아직 기를 포착할 수준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물리학의 이름은 사용하지만 물리학의 검증은 받지 않는 구조입니다.
초능력도 같은 언어를 얻었습니다. 텔레파시는 ‘의식의 비국소적 연결’, 염력은 ‘의식이 양자장에 미치는 작용’, 정신치유는 ‘생체 에너지장의 조절’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작동 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현상에 과학적으로 들리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신과학의 강력한 효과는 초자연적 주장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증명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어휘를 제공한 것”입니다. 미국 국가연구위원회도 1988년 초심리학 연구를 검토한 뒤 초능력 현상의 존재를 정당화할 과학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패러다임은 검증 실패를 면제하지 않습니다
신과학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도 방어 논리로 사용했습니다. 쿤은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이론과 연구 기준, 모범적인 문제풀이를 패러다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심각한 변칙을 더 잘 해결하는 연구 틀이 등장하면 과학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과학에서는 기와 초능력이 실험에서 확인되지 않는 이유를 기존 과학이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효과가 나타나면 신과학이 맞고, 나타나지 않으면 실험자의 부정적인 태도나 측정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어떤 주장도 틀릴 수 없습니다. 반대 증거조차 새로운 지식이 주류 과학에 억압받는 증거로 바뀝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스스로를 새롭다고 부른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기존 이론보다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고 새로운 결과를 예측하며 다른 연구자가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도 철학적으로 낯설어서가 아니라 관측과 실험을 견뎠기 때문에 과학이 됐습니다.
대체의학도 같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신과학의 영향이 가장 현실적인 위험을 남긴 분야는 의료입니다. 막힌 기를 열고, 에너지장을 조절하며, 세포의 파동을 정상화하고, 양자 수준에서 치유 정보를 전달한다는 표현은 구체적인 작용기전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적으로 들립니다.
미국 국립보완통합건강센터는 레이키가 치료자의 손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믿음에 근거하지만, 그러한 에너지장의 존재를 뒷받침할 과학적 증거가 없고 건강상 효과도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보완요법이 무조건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운동, 마사지, 명상이나 침술처럼 특정 증상에서 효과가 관찰되는 접근도 있습니다. 효과와 안전성이 확인된다면 생리학적·심리학적 기전과 임상시험을 통해 의료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문제는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치료가 ‘에너지’, ‘양자’, ‘전체론’이라는 말로 검증을 대신하거나, 검증된 치료를 미루게 만드는 경우입니다. 전통이나 개인적 체험은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임상적 효과의 최종 증거는 아닙니다.
전체론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신과학을 비판한다고 전체론이나 생태학, 시스템적 접근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물과 생태계, 기후와 사회는 수많은 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움직입니다. 현대과학도 복잡계 과학, 네트워크 과학, 시스템 생물학과 생태학을 통해 이를 연구합니다.
이 분야들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선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무엇이 무엇과 연결돼 있고 연결의 강도와 방향이 무엇인지, 조건이 달라질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측정합니다.
전체론과 환원주의도 반드시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구성 요소를 분석하고, 그 요소들이 전체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함께 연구할 수 있습니다.
신과학의 문제는 전체를 보자고 주장한 데 있지 않습니다. 실제 과학과 검증되지 않은 믿음을 ‘전체론’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수준의 지식처럼 보이게 만든 데 있습니다.
과학의 한계와 증거의 상대화는 다릅니다
과학은 완전하지 않으며 언제든 수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과 모든 주장이 동등하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과학은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증거 가운데 무엇이 관찰을 더 정확히 설명하고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며 반복해서 확인되는지를 비교합니다.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아무 주장이나 같은 가치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측정할 수 없다고 어떤 현상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 가능성과 존재의 입증은 다른 문제입니다. 새로운 현상을 주장하는 사람이 관찰과 실험을 통해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신과학은 이 입증 책임을 뒤집었습니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기존 과학이 편협하고 기계론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신과학’이라는 간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연구 가능한 부분은 복잡계와 시스템 과학 같은 분야에서 발전했고, 초자연적인 부분은 양자치유, 파동치료, 에너지의학, 의식과학, 원격치유와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는 자기계발 이론으로 남았습니다.
과학적 증거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들리는 표현이 늘어난 것입니다.
새로운 포장이 남긴 것
신과학은 현대과학의 발견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과학혁명이 아니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이 이미 가지고 있던 동양 신비주의, 초능력, 의식의 진화와 치유 에너지에 대한 믿음에 양자역학과 시스템 이론의 언어를 결합한 운동에 가까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뉴에이지 과학’이 아니라 ‘신과학’으로 번역하면서 성격이 더욱 흐려졌습니다. 과학, 생태학, 철학과 영성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였고, 그 과정에서 초능력·기·대체의학도 새로운 과학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주장을 명확하게 만들고 측정하며, 다른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결과를 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은 신비로운 현상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비가 실제 현상이고, 어떤 신비가 인간의 해석과 기대에서 만들어졌는지를 구분하려고 합니다.
신과학은 그 구분을 흐렸습니다. 초능력, 기와 대체의학은 증거를 더 많이 갖게 된 것이 아니라 과학처럼 보이는 언어를 갖게 됐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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