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정신병이면 책임이 없는가


세 자녀를 살해한 린지 클랜시 사건의 무효심리를 계기로, 정신질환이 형사책임을 없앤다는 형법의 오래된 전제를 검토합니다. 사람을 해친 개를 둘러싼 no-kill 논쟁과 나란히 놓고,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위험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점, 그리고 형법이 원인 규명보다 관찰 가능한 결과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정신질환의 책임과 사회적 보호 사이의 판단을 상징하는 저울

클랜시 사건이 다시 묻게 하는 법률의 오래된 전제

2023년 1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덕스버리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32세였던 간호사 린지 클랜시(Lindsay Clancy)가 자신의 세 자녀를 목 졸라 살해했습니다. 아이들은 5세 코라, 3세 도슨, 생후 8개월 캘런이었습니다. 클랜시는 그 직후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고, 척추를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지는 재판의 쟁점이 아니었습니다. 클랜시는 자신이 아이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순간 그녀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신상태가 있었는가였습니다. 변호인은 클랜시가 산후정신병(postpartum psychosis)을 앓고 있었고 범행 당시 현실을 판단하는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은 그녀가 심각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은 것과 범행 당시 옳고 그름을 가릴 능력이 없었던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맞섰습니다.

2026년 여름 약 5주에 걸쳐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검찰과 변호인은 서로 다른 정신과 전문가들을 불렀고, 같은 진료기록과 같은 행동을 두고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변호인 측은 산후정신병이 그녀의 판단을 지배했다고 보았고, 검찰은 그녀가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 문제를 겪기는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배심원단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11 대 1

배심원은 여성 9명과 남성 3명, 모두 12명이었습니다. 2026년 8월 27일부터 평의를 시작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9월 4일 판사는 결국 mistrial, 즉 무효심리를 선언했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알려진 사실은 더 놀라웠습니다. 배심원들의 사후 설명에 따르면 의견은 팽팽하게 갈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11명은 클랜시에게 형사책임이 없다고 판단하는 쪽이었고, 반대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한 명은 남성이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다른 배심원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남성이 검찰의 주장에 reasonable doubt, 곧 합리적 의심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무죄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나머지 배심원들은 그가 법원이 제시한 증명책임의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 한 명의 태도가 적절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배심원 한 사람이 나머지 열한 명과 다른 판단을 내릴 권리는 당연히 있습니다. 참고로 이 배심원의 행동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만약 합리적인 의심의 부분이 없다고 했으면 간단했을 문제를 합리적인 의심이 있지만, 형사책임이 있다고 한 것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눈여겨볼 것은 나머지 11명이 왜 클랜시에게 형사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는가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주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정신병은 어디까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가

산후정신병은 실제로 존재하는 심각한 질환입니다. 망상, 환각, 사고의 혼란 같은 정신병적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응급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클랜시에게 산후정신병이 있었다는 문장과 산후정신병 때문에 클랜시가 세 아이를 살해했다는 문장은 전혀 다른 문장입니다. 앞의 것은 임상진단에 관한 문제이고, 뒤의 것은 특정 행동의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산후정신병에 걸린 여성이 모두 자기 아이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압도적 다수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산후정신병은 특정 행동의 위험을 높이는 조건은 될 수 있어도, 살인을 반드시 불러오는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별 형사사건에서는 이 두 단계가 너무 쉽게 이어집니다. 정신병이 있었으니 판단력이 손상되었고, 판단력이 손상되었으니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통제할 수 없었으니 살인은 정신병의 결과이고, 따라서 책임이 없다는 식입니다. 문제는 이 화살표 하나하나가 따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뒤로 갈수록 객관적인 증거를 얻기가 급격히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행 순간의 마음을 측정할 수 없다

혈중알코올농도는 측정할 수 있고, DNA도 검사할 수 있으며, CCTV로 행동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특정 시각에 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재는 검사는 없습니다. 법정정신의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범행 전후의 의료기록과 행동, 가족의 증언, 피고인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의 정신상태를 추론하는 것뿐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 사후 자기보고입니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나중에 “남자의 목소리가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사건이 끝난 뒤 만들어진 설명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기억이 재구성되거나 반복적인 상담과 법률적 설명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확정할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범행 전에 이미 기록으로 남은 환청이나 망상은 상대적으로 강한 증거가 되지만, 범행 후에 처음 등장한 주관적 진술은 훨씬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미국 연방 법정의 내부
정신상태에 관한 법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법정. 사진: Carol M. Highsmith·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더 중요한 것은, 정신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당히 높은 확률로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다음 단계가 남는다는 점입니다. 정신병이 존재했다는 것과 살인을 하지 않을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과정은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의 오류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은 어떤 첫 단계가 뒤따르는 여러 결과를 마치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낳는다고 단정하는 오류입니다. 정신병 진단에서 판단능력의 손상으로, 다시 행동통제능력의 상실과 특정 범행의 인과관계로, 끝내 책임 없음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이 단계들은 서로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으며, 앞 단계가 참이라는 이유만으로 뒷단계까지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각각의 연결에는 별도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자기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면책의 근거가 될 때

클랜시 사건에는 불편한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기 자녀가 아니라 남의 세 아이를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면 우리는 똑같이 판단했을까요. 법률적으로는 피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책임능력의 판단기준이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평소 자녀를 사랑하던 어머니가 자기 아이 셋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상적인 어머니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문장은 곧 “그러므로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논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책임이 없다”가 될 때입니다.

그러면 이상한 순환이 만들어집니다. 범죄가 비정상적일수록 정신병의 증거가 되고, 정신병의 증거가 강해질수록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은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살인은 원래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겠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정신이상의 증거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게다가 자기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이 정신이상을 추정하게 하고 그것이 다시 책임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자기 아이의 생명이 남의 아이보다 법적으로 덜 보호되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건을 하나 겹쳐 보면

사람이 아니라 개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개가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개에게 인간과 같은 의미의 도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습니다. 개가 형법을 알고 범죄를 계획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숙고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능력만 따진다면 개는 사실상 완전한 무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죽인 개를 그대로 돌려보내야 할까요. 현실에서는 이 질문을 두고 오래전부터 격렬한 싸움이 벌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클랜시 사건에서 다투어진 철학적 문제는, 동물권과 no-kill 운동에서 이미 여러 차례 똑같이 등장했습니다.

보호자와 함께 있는 개
보호자와 함께 있는 개. 본문의 Onion·Mickey·Bruce 사건의 개가 아닌 비교용 사진이다. 사진: Linda Bartlett·미국 국립보건원, 퍼블릭 도메인.

아이를 죽인 Onion

2012년 네바다주 헨더슨에서 약 120파운드, 54kg에 이르는 Mastiff-Rhodesian Ridgeback 혼종견 Onion이 한 살짜리 Jeremiah Eskew-Shahan을 공격해 죽였습니다. 아이의 가족은 이 사건을 비극적인 사고로 받아들이면서도 개를 당국에 넘겨 안락사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제3자인 동물권 법률단체 The Lexus Project가 개입했습니다. 이들은 안락사를 막으려고 소송을 제기했고, 사건은 네바다 대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주장의 핵심은 Onion을 죽이지 말고 다른 주의 sanctuary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 논리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Lexus Project 측은 Onion이 본성에 따라 반응했을 뿐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취지로 주장했습니다. 피해 아동의 가족이 안락사를 받아들였는데도, 동물권 단체가 법원의 집행을 막은 것입니다. 법정싸움은 2년 가까이 이어졌고, 결국 Onion은 죽지 않았습니다. 2014년 당국에서 풀려나 보호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이 논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이에게 복수한다고 죽은 아이가 돌아오지도 않으며, 개의 행동에는 본능적이고 상황적인 이유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사실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나옵니다. 54kg짜리 개가 어린아이의 행동에 본능적으로 반응해 아이를 죽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개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 아닌가. “본능이었으므로 책임이 없다”와 “본능적으로 이렇게 행동한다면 위험하다”는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얼굴이 파괴된 네 살 아이와 Mickey

2014년 애리조나 피닉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Pit bull Mickey가 네 살짜리 Kevin Vicente의 얼굴을 심하게 물었고, 아이는 안와와 턱 등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오랜 기간에 걸친 재건수술이 필요했습니다.

사건 이후 Mickey를 살려달라는 Facebook 페이지에 수만 명이 모였고 온라인 탄원운동이 벌어졌습니다. Lexus Project도 Mickey를 살리는 데 참여했습니다. 법원은 결국 Mickey를 vicious dog로 인정했지만 안락사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거세하고 이빨을 제거하고 마이크로칩을 삽입한 뒤 평생 시설에서 살게 하고 입양은 금지했습니다. 개가 살게 되었다는 결정이 나오자 한 동물보호 활동가가 눈물을 흘렸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Mickey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논쟁의 중심이 피해를 입은 네 살 아이가 아니라 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26년의 Bruce 사건

이런 논쟁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2026년 캘리포니아에서는 약 100파운드의 Great Pyrenees/German Shepherd 혼종견 Bruce를 두고 법정싸움이 벌어졌습니다.

Bruce에게는 여러 차례의 공격 기록이 있었습니다. 2024년에는 미성년자의 입술을 물어 심각한 얼굴 열상을 입혔고, 2025년에는 성인 남성을 여러 부위에서 물어 봉합치료가 필요하게 했으며, 같은 해 다른 여성의 팔을 물어 수술과 피부이식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2026년에는 휠체어를 밀고 가던 남성을 넘어뜨리기도 했습니다. Ventura County는 Bruce를 위험한 개로 판단하고 안락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Santa Paula Animal Rescue Center와 전 소유자가 이를 막으려고 소송을 냈습니다. 연방법원에서 시작된 법적 대응은 제9연방항소법원을 거쳐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에 긴급신청을 내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구조단체는 자신들이 Bruce를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고 비용과 책임도 부담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법원들은 안락사를 막지 않았고, Bruce는 2026년 8월 12일 안락사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쟁점은 같습니다. Bruce가 나쁜 개였느냐가 아니라, 네 차례에 걸쳐 심각한 공격이 일어난 뒤에도 사회가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이것은 동물권자들만의 특이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모든 동물보호단체가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PETA처럼 심각한 공격성을 가진 동물에 대해서는 안락사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극단적인 no-kill 정책이 사람과 다른 동물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물권 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경한 no-kill 운동에서는 Onion, Mickey, Bruce 같은 사건마다 같은 주장이 반복됐습니다. 동물에게는 죄가 없고, 공격에는 이유가 있었으며, 환경을 바꾸면 되고, 죽이는 것은 복수일 뿐이니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름의 논리적 일관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책임이 없다는 사실과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혼동하게 됩니다.

책임과 위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람을 죽인 개를 떠올리면 이 차이는 아주 쉽게 이해됩니다. 개에게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 해도 그 개는 여전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라면, 어떤 조건에서 같은 행동을 되풀이할지 예측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개는 사람을 죽인 것에 도덕적 죄가 없다는 문장과 그러나 이 개를 다시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촉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문장은 아무 모순 없이 동시에 성립합니다.

클랜시 사건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호인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받아들여, 클랜시가 정신병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도덕적 비난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결론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결론이 따라옵니다. 특정한 정신상태에 들어가면 자신의 세 아이를 살해할 만큼 행동통제능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임을 감소시키는 설명인 동시에 위험성을 키우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형사법에서는 같은 사실이 주로 통제할 수 없었으므로 책임이 없다는 방향으로만 쓰이고, 그다음 질문인 통제할 수 없는 행동이 다시 나타날 위험을 사회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는 뒤로 밀립니다.

정신병이면 죄가 경감된다는 전제부터 다시

현대 형법에는 아주 오래된 전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면 형사책임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철학적으로는 이해할 만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나 심한 치매 환자,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정상적인 성인과 같은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법률의 목적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정확한 도덕적 평가인가, 아니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피해를 줄이는 것인가. 후자도 중요한 목적이라면, 정신병에 대한 지금의 접근방식은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심각한 범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원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알기 어렵다

인간은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왜 저 사람이 그런 일을 했는지, 어떤 병 때문인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뇌의 문제인지, 약 때문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복잡한 인간 행동에는 대개 단일한 원인이 없습니다. 산후정신병이 있는 사람이 모두 살인을 하지 않고,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모두 자살하지 않으며, 술을 마신 사람이 모두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모두 범죄자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조건이 특정 행동의 확률을 높였다는 통계적 사실과, 그 조건이 한 개인의 특정 행동을 만들어냈다는 인과적 판단은 전혀 다른 수준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후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때로는 그 판단에 전문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전문가는 당시의 정신상태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범행 몇 달 또는 몇 년 뒤에 기록과 진술을 읽고 과거의 마음을 재구성할 뿐입니다. 그것이 무의미한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증거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의 관점에서 보면 질문이 달라진다

원인을 완벽하게 알 수 없다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클랜시 사건에서 세 아이가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도 압니다. 반면 범행 순간 그녀의 내면에서 어떤 정신적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는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결과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질문이 바뀝니다. “정신병이 이 살인의 진짜 원인이었는가”보다는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실제로 했다는 사실을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때 정신질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정신질환은 책임을 없애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치료와 위험관리를 결정하기 위한 정보가 됩니다. 정신병이 심하다면 일반 교도소보다 정신병원에서 치료해야 할 수 있고, 위험이 지속된다면 장기간 격리가 필요할 수 있으며, 치료로 위험이 크게 줄었다면 그것 역시 객관적인 평가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정신병이 있었다 → 책임이 없다 → 따라서 처분도 가벼워진다는 연결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개를 통해 보면 오히려 문제가 선명해진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질환자를 개와 같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권리와 존엄, 적법절차가 있고, 동물에 대한 법적 처분과 인간에 대한 형사처분은 당연히 다릅니다. 여기서 견주고 있는 것은 판단의 논리입니다.

개의 경우 우리는 두 질문을 자연스럽게 나눕니다. 이 개에게 도덕적 죄가 있는가이 개는 앞으로 위험한가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다고 해서 두 번째 질문에도 “아니다”라고 답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정신이상 사건에서는 이 둘이 이상하리만치 쉽게 붙어 버립니다. 책임능력이 없으니 무죄라는 데까지는 기존 법률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사회 보호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다음 질문이 뒤따라야 합니다. 책임을 질 능력조차 없을 만큼 행동통제능력이 무너져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 앞으로의 위험을 판단하는 중요한 정보 아닌가.

형법은 원인을 심판하는 제도여야 하는가

법은 오랫동안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심하게 손상되면 책임도 줄어든다는 전제 위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이 전제에는 충분한 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행동의 원인을 끊임없이 제시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정신질환 때문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충동조절 장애 때문에, 뇌손상 때문에, 약물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 원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 앞선 원인의 결과가 되고, 그 끝에는 결정론이 있습니다. 결정론을 끝까지 적용하면 누구에게도 궁극적인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렇게 운영될 수 없습니다.

법률의 기본 전제를 다시 살펴볼 때다

클랜시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산후정신병이라는 특정 질환에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우리가 법률에서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전제, 곧 원인을 이해하면 책임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전제를 다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인간 행동의 원인을 정확히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범행이 끝난 뒤 피고인의 내적 상태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정신이상 사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훨씬 적습니다. 누가 무엇을 했는가,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행동이 다시 나타날 수 있는가, 어떤 조치가 그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가. 법은 어쩌면 이런 관찰 가능한 사실과 결과에 훨씬 더 집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정신질환자를 가혹하게 처벌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도덕적 비난과 사회적 보호를 분리하자는 것입니다. 정신병 때문에 행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에게 복수할 이유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그 위험까지 떠안을 이유는 없습니다.

Onion에게 악의가 없었다고 해서 한 살짜리 아이가 살아 돌아오지 않고, Mickey가 나쁜 개가 아니었다고 해서 네 살 아이의 얼굴에 남은 손상이 사라지지 않으며, Bruce의 공격에 환경적 이유가 있었다고 해서 네 번의 공격이 없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클랜시에게 산후정신병이 있었다고 해도 코라와 도슨과 캘런이 죽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얼마나 악한가만이 아닙니다. 앞으로 같은 피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입니다. 어쩌면 형사법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었던 궁극적 원인을 찾아내려 하기보다,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행동과 그 결과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때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사건과 법률

의학과 법정정신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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