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경직된 친화성 — 동물을 살리려는 마음이 동물을 더 고통스럽게 할 때


폴 블룸의 경직된 친화성(unmitigated communion) 개념을 통해 동물보호 활동이 무제한적 감정몰입과 한계 수용 거부로 흘러갈 때 나타나는 자기 파괴와 동물 복지 악화의 역설을 분석합니다.

과밀된 동물보호소에서 번아웃된 활동가와 동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러스트

동물보호 활동과 경직된 친화성

동물보호 활동은 강한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길에 버려진 개, 번식장에서 학대받은 개,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고양이를 보면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그 동물을 병원으로 데려가고, 집으로 데려오며, 자신의 돈과 시간을 사용합니다. 처음 한두 마리로 시작한 구조가 열 마리, 수십 마리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분명 선의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받는 동물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현실적인 한계와 결합하지 못하면, 구조자는 자신의 삶을 소진하고 보호시설은 과밀해지며 동물의 생활환경도 악화될 수 있습니다.

폴 블룸이 소개한 "경직된 친화성", 즉 unmitigated communion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경직된 친화성이란 무엇입니까?

친화성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 그들의 감정과 필요를 살피며 돕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돌봄과 협력, 가족과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문제는 친화성이 자신의 판단력과 한계를 압도할 때입니다.

경직된 친화성이 강한 사람은 다른 존재의 고통과 요구를 자신의 필요보다 항상 우선합니다. 도움을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의 문제를 계속 떠맡으며, 자신이 지쳐도 돌봄을 중단하지 못합니다. 이 성향은 일방적으로 타인을 지원하지만 정작 자신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비대칭적 관계, 불안과 우울 같은 심리적 부담과 연관된다고 보고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이 따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건강한 친화성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돕고, 필요한 경우 다른 사람과 기관에 책임을 나누며, 도움의 결과가 실제로 좋은지를 판단합니다.

경직된 친화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가 고통받는 모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까지 떠맡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심리 구조는 인간관계에서의 "벨 콤플렉스(Belle Complex)"나 공동의존(Co-dependency)과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동화 미녀와 야수에서 주인공 벨이 자신이 무한히 참고 희생하면 야수를 구원하여 우아한 왕자로 바꿀 수 있다고 믿듯, 경직된 친화성에 사로잡힌 이들은 '내가 아니면 이 동물을 구할 수 없다'는 낭만적 신념과 구원자 의식에 빠져듭니다.

알코올중독자의 배우자가 상대의 빚과 사고를 계속 대신 수습하며 스스로를 구원자로 착각하는 공동의존처럼, 당장의 구원자라는 도덕적 위안은 얻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상대의 문제를 지속시키고 자기 자신과 대상 모두를 소진시키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동물 구조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구조를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

동물 구조자는 대개 “이 동물을 받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상황에 놓입니다.

공공보호소의 보호기간이 끝난 개, 교통사고를 당한 고양이, 주인이 포기한 대형견, 다른 보호소에서 거절한 공격성 있는 개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구조자는 이미 보호 중인 동물이 많고 돈과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거절하지 못합니다.

한 마리를 받으면 기존 동물의 공간이 좁아집니다. 의료비가 부족해지고 산책과 사회화 시간이 줄어듭니다. 다시 한 마리를 받으면 상황은 더 나빠집니다.

하지만 구조를 거절하는 순간 그 동물이 죽을 수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계속 받아들입니다.

결국 보호소에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동물 수가 관리 능력을 초과합니다.
  • 청소와 질병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 싸움과 스트레스가 증가합니다.
  • 입양 가능성이 낮은 동물이 수년간 갇혀 지냅니다.
  • 구조자의 부채와 노동시간이 계속 늘어납니다.
  • 기존 동물도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더 많은 동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동물을 최소한의 상태로 붙들어 두는 일"이 됩니다.

모든 생명을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강박

오늘날 동물보호 활동에서는 “안락사 없는 보호소”가 가장 도덕적인 목표처럼 제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강력한 호소력을 가집니다. 반대로 안락사를 시행하는 보호소는 잔인하거나 무능한 곳으로 비난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안락사 숫자가 0이라는 사실만으로 동물복지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입양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개가 좁은 견사에서 수년간 살아가고, 심각한 공격성 때문에 사람이나 다른 동물과 접촉하지 못하며, 만성질환과 통증을 치료하지 못한 채 생명만 연장된다면 그것이 좋은 보호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과 잘 살고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안락사를 무조건 거부하면 보호소는 동물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숫자를 관리하게 됩니다. 이미 들어온 동물을 내보낼 수 없으므로 새로운 구조 요청을 거절합니다.

결과적으로 안락사 없는 대형 시설은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지만, 그 시설에 들어가지 못한 대형견과 노령견, 행동문제견은 지역 보호소나 개인 구조자에게 남습니다.

안락사를 거부한 비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는 것"입니다.

공감은 한 마리를 보지만 보호정책은 전체를 봐야 합니다

폴 블룸은 공감이 스포트라이트와 같다고 말합니다. 공감은 눈앞의 특정한 피해자에게 강하게 반응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다른 존재와 비용은 잘 계산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런 이유로 공감을 도덕정책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보다 이성적 연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동물보호에서도 한 마리의 사연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오랫동안 학대받은 개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수천만 원이 모일 수 있습니다. 반면 같은 돈으로 수백 마리의 중성화, 예방접종과 기초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감정을 크게 자극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있는 한 마리는 구체적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앞으로 유기될 수백 마리는 추상적입니다.

경직된 친화성은 이 차이를 더 심하게 만듭니다.

눈앞의 한 마리를 포기하는 죄책감은 견디지 못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구조되지 못한 다른 동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동물보호 활동은 다음과 같은 역설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을 살리겠다는 원칙 때문에
실제로는 더 적은 동물만 보호하게 됩니다.

활동가도 보호해야 합니다

동물보호 활동가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장면을 봅니다.

학대받은 동물, 버려진 동물, 치료비가 없어 죽는 동물, 입양되지 않는 개를 반복적으로 접합니다. 구조 요청을 거절하면 죄책감을 느끼고, 받아들이면 돈과 노동이 부족해집니다.

어느 선택을 해도 비난받습니다.

동물을 받지 않으면 냉정하다고 욕을 먹고, 안락사를 하면 살인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대로 무리하게 동물을 받아 과밀해지면 관리 부실로 비난받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먼저 무너집니다.

경직된 친화성은 활동가에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잠을 자거나 휴가를 가고, 구조를 거절하고, 치료 가능성이 없는 동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을 도덕적 실패로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보호자가 무너지면 동물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동물보호 제도는 동물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돌보는 사람의 판단력과 지속 가능성도 보호해야 합니다.

안락사 기준을 조금 현실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동물보호법은 보호 중인 동물에게 질병 등 법령상 사유가 있을 경우, 수의사가 마취 등을 통해 고통을 최소화하는 인도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규정합니다. 안락사는 수의사가 시행해야 하며 자의적인 처분이 허용되는 구조는 아닙니다.

문제는 사회적 분위기가 법적 기준보다 훨씬 경직돼 있다는 점입니다.

치료 불가능한 질병과 극심한 고통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인도적 안락사를 합리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고 지속적인 통증을 겪는 경우
  • 반복적인 중대한 공격으로 사람이나 다른 동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
  • 충분한 기간의 행동평가와 교정에도 안전한 입양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경우
  • 장기간 극도의 공포와 스트레스 속에 있으며 삶의 질 회복 가능성이 없는 경우
  • 보호시설 과밀로 인해 해당 동물과 기존 동물 모두 심각한 복지 저하가 예상되는 경우

여기서 “기준을 느슨하게 한다”는 말은 아무 동물이나 쉽게 죽이자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기준을 더 명확하게 만들자"는 뜻이어야 합니다.

수의사 한 사람의 즉흥적인 판단이나 보호소장의 편의에 맡길 것이 아니라, 수의학적 평가, 행동평가, 보호기간, 치료 가능성, 반복적인 입양 시도와 삶의 질을 기록해 일정 기준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수의사, 행동전문가와 외부위원이 함께 판단하고 결정 이유를 공개해야 합니다.

안락사의 요건은 지금보다 현실적일 수 있지만 절차는 더 엄격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안락사를 강제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

일부 민간 보호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안락사를 시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 결과 보호동물이 관리 가능한 수를 넘고, 치료가 중단되며, 동물들이 좁은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면 국가는 개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호시설의 수용 능력과 동물복지 기준을 초과했는데도 계속 동물을 받아들이거나, 회복 가능성이 없는 동물을 고통 속에 방치하는 것은 생명 보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일정한 경우에는 시설 운영자의 감정이나 종교적·윤리적 신념과 무관하게 수의학적 심사를 거쳐 안락사를 시행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동물을 제거하기 위한 강제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한 강제입니다.

  • 수백 마리의 동물이 배설물과 질병 속에 방치되는 애니멀 호딩
  • 공격성 있는 개들이 평생 격리된 채 사는 상황
  • 치료 불가능한 동물이 통증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
  • 한 시설의 과밀 때문에 지역의 다른 동물들이 구조되지 못하는 상황
  • 보호자가 죄책감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동물을 계속 받아들이는 상황

안락사를 전면 금지하는 것이 항상 생명존중은 아닙니다.

때로는 죽음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더 긴 고통을 만드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안락사는 구조정책의 대안이 아닙니다

안락사 기준을 현실화한다고 해서 유기동물 문제를 안락사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안락사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보다 먼저 번식과 판매 관리, 동물등록, 중성화, 소유자 책임, 유기 처벌, 입양 지원과 지역 보호소의 예산을 강화해야 합니다.

특히 대형견이 유기된 뒤 입양되지 않는 문제를 줄이려면 대형견의 충동구매와 무분별한 번식을 줄여야 합니다. 보호시설에 들어온 뒤의 죽음만 논의하고, 계속 동물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방치한다면 문제는 반복됩니다.

안락사 기준의 현실화는 예방정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정책이 실패한 마지막 단계에서 동물과 보호자를 함께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존중한다는 말은 무조건 심장을 계속 뛰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삶의 가능성, 통증과 공포, 관계와 활동, 회복 가능성을 함께 판단해야 합니다.

동물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동물의 삶도 중요합니다.

동물이 좁은 견사에서 수년간 불안과 공격성 속에 살아가고, 사람과 다른 동물에게 위험해 접촉도 하지 못한다면 단순한 생존이 반드시 복지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조자의 희생을 무한히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재산과 건강, 가족관계와 생업을 모두 포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사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경직된 친화성은 고귀한 희생처럼 보이지만, 자기 파괴와 동물 방치가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한 동물보호는 다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동물을 개인이 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공격성 있는 개를 안전하게 입양시킬 수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을 무기한 연장하는 것이 동물복지는 아닙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냉정함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더 많은 동물을 더 오래 보호하기 위한 책임입니다.

공감에서 이성적 연민으로

동물보호에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공감이 없다면 사람은 버려진 동물의 고통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만으로 보호정책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공감은 한 마리를 구하게 하지만, 이성적 연민은 전체 보호동물의 수와 삶의 질, 구조자의 능력과 사회적 비용을 함께 봅니다.

경직된 친화성은 “내가 이 동물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성적 연민은 다르게 묻습니다.

이 동물에게 실제로 회복 가능한 삶이 있습니까?
이 선택이 기존 보호동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구조자가 이 책임을 지속해서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같은 자원으로 더 많은 고통을 줄일 방법은 없습니까?

동물을 보호하려면 감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물보호 활동가와 더 많은 동물을 함께 보호하려면 감정에 한계를 설정하는 제도도 필요합니다.

안락사는 실패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안락사를 악으로 규정하면 실패를 숨기고 고통을 연장하게 됩니다.

필요한 것은 안락사를 쉽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책임 있게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관련 태그:
← 정원 첫 화면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