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권 논쟁은 흔히 인간과 동물의 대립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권리를 지킬 것인가, 동물에게도 권리를 줄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물권 논쟁은 인권 자체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듭니다.
우리는 보통 인권을 보편적이고 동일한 것으로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존엄을 갖고, 같은 기본권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이 원칙은 현대 문명의 핵심입니다. 인종, 성별, 계급, 지능, 재산, 장애, 출생 조건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나누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동물권 논쟁은 이 약속의 경계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우리가 인권을 전형적인 성인 인간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확대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동물에게도 도덕적 고려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에 있는 사람이란 영아, 중증 지적장애인, 치매 환자, 의식이 불완전한 환자처럼 이성, 언어, 자율성, 도덕적 책임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인간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고 해서, 계약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생명과 고통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동물권의 출발점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동물도 고통을 느낍니다. 공포를 느끼고, 애착을 갖고, 스트레스를 받고, 죽음을 피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동물의 고통은 도덕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피터 싱어가 말한 종차별 비판도 여기서 힘을 얻습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도덕적 고려의 기준이라면, 인간의 고통만 중요하고 동물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 동물권 논쟁은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권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입니다. 우리가 이성, 언어, 생산성,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인간의 권리를 차등화하지 않는다면, 동물에게도 일정한 권리 또는 최소한 강한 도덕적 고려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동물에게도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면, 그 권리는 인간의 권리와 같은 것입니까. 동물의 고통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면, 인간의 고통과 동물의 고통은 완전히 같은 무게를 가져야 합니까. 개 한 마리의 생명과 인간 한 명의 생명은 동일하게 계산되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동물권 논쟁은 인권의 숨겨진 전제를 드러냅니다.
인권은 천부의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약속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인권이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사람이 모든 면에서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능이 다르고, 판단력이 다르고, 감정 능력이 다르고, 책임 능력이 다르고, 자기 인식의 깊이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위대한 예술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복잡한 수학을 이해하며, 어떤 사람은 평생 타인의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실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권이 같다고 가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를 권리의 차이로 바꾸는 순간, 인간 사회는 매우 위험한 길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높은 인간인가. 누가 더 낮은 인간인가. 누가 더 살 가치가 있는가. 누가 더 희생되어도 되는가. 이런 질문을 제도화하는 순간 인권은 무너집니다.
따라서 인권의 동일성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 문명이 선택한 규범적 가정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차이를 측정하고 등급화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는 동일한 기본권을 부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권은 이 가정을 흔듭니다. 동물에게 권리를 인정하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면 동일하다”는 경계 안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따져야 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 자기의식, 미래 계획 능력, 사회적 관계, 학습 능력, 죽음에 대한 인식 같은 요소를 비교해야 합니다. 그 순간 권리는 단순히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셸리 케이건이 동물윤리에서 주장한 것도 이 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물은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동물과 인간의 도덕적 지위가 완전히 같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의 입장은 위계적입니다. 사람은 동물보다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고, 동물들 사이에도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케이건의 『How to Count Animals, More or Less』는 바로 이 위계적 동물윤리를 다룹니다.
케이건의 주장이 불편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동물만 차등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차이 문제도 다시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가 능력과 의식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면, 왜 인간 내부에서는 그런 차이가 전혀 고려되지 않아야 합니까. 영아, 중증 장애인, 치매 환자, 성인 인간, 천재적 과학자는 정말로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습니까.
현대 인권은 이 질문을 피합니다. 그리고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는 순간, 인간을 등급화하려는 유혹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인권은 인간의 차이를 부정해서 성립한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정치적 권리의 차이로 바꾸지 않겠다는 결단 위에 성립했습니다.
그러나 동물권은 그 결단의 바깥에서 작동합니다. 동물을 인간과 같은 도덕 공동체 안으로 들여오려면, 우리는 결국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단순히 고통을 느끼는가. 자기의식이 있는가. 미래를 계획하는가. 사회적 관계를 맺는가. 죽음을 이해하는가. 이런 기준을 세우는 순간 도덕적 지위는 위계화됩니다. 동물권은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역설적으로 권리가 모두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동물권 논쟁의 가장 깊은 역설입니다. 동물권은 인권의 논리를 확장해서 등장합니다. 경계에 있는 인간에게도 권리를 인정한다면, 동물에게도 최소한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권리의 동일성이라는 인권의 핵심 가정이 사실은 증명된 진리가 아니라 정치적·도덕적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동물권은 인간이 동물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옳습니다. 동물의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물을 물건처럼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동물권이 인간의 권리와 완전히 같은 형태로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인권의 토대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권리를 능력과 감각과 의식의 정도에 따라 계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권리가 인간의 권리와 같은가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권리들조차 정말 모두 같은가입니다.
현대 문명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모두 같지 않지만, 인간이라는 경계 안에서는 동일한 기본권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과학적 발견이 아니라 문명적 합의입니다. 인간을 등급화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그러나 동물권은 이 안전장치 바깥에서 묻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면 왜 인간만 특별한가. 이 질문은 정당합니다. 동시에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결국 인간 내부의 차이까지 다시 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물권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동물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동물과 인간의 권리가 완전히 동일하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도덕적 지위의 위계를 인정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셸리 케이건이 말하듯, 동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동물권은 인권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권의 경계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불편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인권은 인간의 동일성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차이를 권리의 차이로 바꾸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동물권은 그 약속의 바깥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어디까지 도덕 공동체 안에 넣을 것인가. 그리고 그 도덕 공동체 안에서 모두를 정말 동일하게 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답은 아마도 계층적 보편주의일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같은 방식으로 계산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 같은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차이가 있지만, 인간 사회의 정치적 질서를 위해 동일한 기본권을 갖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반면 동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지만, 인간과 같은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 간주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냉정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물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동물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권의 동일성이라는 문명적 장치를 지키는 길입니다.
동물권은 우리에게 동물을 다시 보게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동물권이 인간의 권리도 다시 보게 한다는 점입니다. 인권은 자연에 그대로 쓰여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등급화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위대한 규범입니다. 동물권이 그 규범을 흔드는 순간, 우리는 인권의 가치를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참고문헌
- Shelly Kagan. (2019). How to Count Animals, More or Less. Oxford University Press.
- Shelly Kagan. (2018). "For Hierarchy in Animal Ethics." Journal of Practical Eth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