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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라는 사치


글로리아 스테이넘과 벨 훅스의 결혼관과 페미니즘을 비교하며, 엘리트 페미니즘의 자유와 약자의 현실을 분석합니다.

이념이라는 사치

이념이라는 사치

글로리아 스테이넘의 자유와 벨 훅스의 현실

2000년 9월 3일, 오클라호마의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해가 지평선 위로 막 올라오던 시간, 글로리아 스테이넘은 데이비드 베일과 결혼했습니다. 장소는 화려한 호텔도, 대도시의 예식장도 아니었습니다. 체로키 네이션 최초의 여성 수석추장이었던 윌마 맨킬러의 오클라호마주 Adair County 자택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작고 조용했습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이 모였고, 의식에는 시민 결혼식과 체로키 전통의 요소가 함께 들어갔습니다. 윌마 맨킬러와 남편 찰리 솝이 이 의식을 주최했고, 오클라호마 판사 샌디 크로슬린도 함께했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언어였습니다. 두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의 “남편과 아내”라기보다 “파트너”로 불렸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평생 결혼 제도를 의심해 온 여성, 결혼이 여성을 법적으로 반쪽 인간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던 여성이, 66세의 나이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결혼은 전통적 가부장제의 문법을 그대로 반복하는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도시 엘리트의 세련된 결혼식도 아니었고, 교회와 아버지의 인도를 중심으로 한 낡은 결혼식도 아니었습니다. 오클라호마의 새벽, 원주민 여성 지도자의 집, 시민 의식과 체로키 의식이 겹쳐진 작은 자리에서, 그녀는 “아내”가 아니라 “파트너”로 호명되었습니다.

그 결혼식은 스테이넘의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일관성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무조건 거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종속시키는 결혼의 언어와 권력관계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하되, 기존 결혼의 상징을 최대한 바꾸려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파트너. 소유와 복종이 아니라 동행. 법적 제도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 제도 안의 언어를 다시 쓰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 때문에 더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결혼은 누구에게 가능한 것일까요. 66세의 스테이넘에게 가능했던 자유로운 선택이, 젊고 가난하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했던 보통 여성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가능했을까요. 이 질문을 던질 때, 글로리아 스테이넘은 단순한 페미니즘의 영웅이 아니라, 엘리트 페미니즘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 됩니다.

페미니즘을 세련된 언어로 바꾼 여성

글로리아 스테이넘은 페미니즘을 매력적이고, 세련되고, 대중적인 언어로 바꾼 인물이었습니다. 급진적 이론가들이 학술적 언어로 가부장제를 비판했다면, 스테이넘은 그것을 잡지, 강연, 인터뷰, 대중문화의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녀는 어떤 이론가보다도 페미니즘을 미국 주류 사회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고,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관계, 결혼, 일,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공동 창간한 《Ms.》는 페미니즘 저널리즘을 전국적 대중매체의 형식으로 만든 중요한 잡지였습니다. 《Ms.》는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페미니스트 저널리즘을 가능하게 하며, 페미니스트 세계관을 대중에게 제공한 전국 잡지였습니다. 스테이넘은 강연자이자 저술가이자 활동가로서 대학 캠퍼스와 언론, 출판 시장을 오가며 페미니즘을 하나의 생활양식이자 세대적 감수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스테이넘은 단순한 여성운동가가 아니라, 20세기 후반 미국 여성들이 자기 삶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꾼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영향력은 법률이나 제도 변화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 세대에 걸친 미국 여성들에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스테이넘의 역사적 역할은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녀는 많은 여성에게 언어를 주었습니다. 여성은 반드시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보조자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중적 언어로 전달했습니다. 여성도 자기 이름으로 말할 수 있고, 자기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자기 욕망을 설명할 수 있고, 자기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대중적 언어는 늘 위험도 가집니다. 어떤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선명한 구호로 바꾸는 순간, 그 언어는 강력해지지만 동시에 거칠어집니다. 스테이넘의 페미니즘도 그랬습니다. 그녀는 결혼, 로맨스, 여성의 자아, 독립, 남성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석은 주로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훗날 벨 훅스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의 비판이 등장합니다.

로맨스 신화에 대한 의심

스테이넘은 사랑이나 성관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의심한 것은 로맨스 그 자체라기보다, 가부장적 문화가 만들어낸 로맨스의 신화였습니다. 그녀는 《내면으로부터의 혁명: 자존감의 책》에서 “가부장적이고 성별 구분이 심한 문화일수록 로맨스에 중독된다”고 썼습니다. 그녀가 보기에 로맨스 신화는 인간이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이 자기 안에서 길러야 할 힘과 자율성을 남성에게 투사하게 만듭니다.

이 관점에서 로맨스는 단순한 개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독립성, 경제력, 사회적 힘, 자기 결정권을 직접 획득하기보다, 이상화된 남성을 통해 그것을 대리적으로 얻으려는 문화적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테이넘은 여성들에게 남성과의 사랑을 포기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로맨스가 자기 발견과 자율성을 대신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표현, “우리는 우리가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여성은 더 이상 자신의 경제적 안정, 사회적 지위, 감정적 안전을 남편이라는 존재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그것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테이넘에게 페미니즘은 남성을 미워하는 일이 아니라, 여성이 자기 삶의 중심을 남성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당시 여성들에게 매우 강한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남편의 수입, 남편의 사회적 지위, 남편의 승인, 남편의 이름을 통해서만 자기 삶을 구성하던 여성들에게, “당신이 그 남자가 되어라”는 말은 강력했습니다. 그것은 남성을 닮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동안 남성에게 맡겨두었던 힘을 자기 안에서 회복하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도 계급의 조건이 숨어 있습니다. 여성이 “자신이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가 되려면 교육, 직업, 소득, 사회적 이동성, 안전한 도시 환경, 법적 권리, 문화적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런 조건을 가진 여성에게 이 말은 해방의 선언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이 없는 여성에게 이 말은 때로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으로 남습니다.

결혼관: 한 사람과 반쪽 사람

스테이넘의 결혼관은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녀가 문제 삼은 것은 사랑이나 남녀의 친밀함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비판한 것은 결혼이 법과 관습 속에서 여성을 독립된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남편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반쪽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1987년 그녀는 결혼에 대해 “법적으로 말하면, 결혼은 한 사람과 반쪽 사람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결혼하면 여성은 “반쯤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스테이넘의 결혼관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에게 전통적 결혼은 두 명의 온전한 개인이 맺는 평등한 계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명의 완전한 법적 주체와, 그에게 종속되는 반쪽 주체 사이의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스테이넘은 결혼 제도를 단순히 낭만적 사랑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혼이 여성에게 아내의 역할, 남편 중심의 삶, 가정 안의 종속적 위치를 강요해 왔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결혼을 개혁해야 할 제도로 보았고, 때로는 기존 결혼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이 점을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스테이넘은 남성과의 사랑이나 성적 관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거부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여성을 법적·경제적·정서적으로 남성에게 종속시키던 결혼의 낡은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스테이넘의 결혼 비판은 남성 혐오라기보다, 결혼이 두 명의 온전한 개인 사이의 평등한 파트너십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이 스테이넘을 단순한 결혼 반대론자로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녀는 결혼을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결혼이 담고 있는 언어와 권력관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남편과 아내, 가장과 부양자, 보호자와 의존자라는 낡은 구조가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의 삶을 가진 채 결합하는 파트너십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스테이넘은 결혼을 비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여러 남성과 깊고 장기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것은 위선일까요. 아니면 인간관계와 제도 비판 사이의 더 복잡한 긴장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그녀가 사랑했던 남성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

스테이넘의 삶을 단순히 “남성이 필요 없다고 말한 여성”으로 요약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그녀는 남성과의 사랑이나 친밀한 관계 자체를 거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중요한 관계만 보아도 블레어 초치노프, 로버트 벤튼, 스탠 포팅어, 모트 주커만, 데이비드 베일이 있습니다.

블레어 초치노프

젊은 시절 스테이넘에게 매우 중요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블레어 초치노프였습니다. 초치노프는 Air National Guard의 파일럿이었고, 《New York Post》에서 레스토랑 칼럼을 쓰던 인물이었습니다. 스테이넘은 스미스칼리지 시절 친구의 소개로 그를 만났고, 두 사람은 곧 깊은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초치노프는 매력적이고 세련된 남성이었으며, 스테이넘에게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실제 삶의 가능성으로 느끼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약혼까지 했습니다. 스테이넘은 한때 초치노프와 결혼할 생각을 했고, 실제로 결혼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들어가려는 결혼의 의미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아내의 역할, 가정 안의 위치, 남편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삶을 요구했습니다.

스테이넘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약혼반지를 남겨둔 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떠나 인도로 향했습니다. 이 장면은 스테이넘의 삶에서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녀는 사랑을 몰라서 결혼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자신을 어떤 제도 안으로 밀어 넣는지 더 분명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초치노프와의 관계는 스테이넘의 이후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첫 장면입니다. 그녀는 남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결혼이 요구하던 아내의 삶을 거부했습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하면 스테이넘은 단순한 모순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보면 그녀의 삶은 더 일관적으로 보입니다.

로버트 벤튼

스테이넘의 삶에는 결혼 제도에 대한 공개적 비판과 사적인 삶의 복잡성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결혼이 여성을 독립된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쪽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비판했지만, 실제 삶에서 결혼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40대 초반, 스테이넘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벤튼과 결혼 직전까지 갔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단계적으로 검토했고, 혈액검사와 결혼 허가증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둘 다 결혼을 정말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결국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스테이넘을 단순한 위선자로 만들기보다, 그녀 자신도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서 흔들렸던 인간이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결혼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사랑과 동반자 관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결혼이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흡수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끝까지 경계했습니다.

로버트 벤튼과의 관계는 초치노프와의 관계보다 더 성숙한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결혼이 자신을 닫아버리는 문처럼 느껴졌다면, 40대 초반의 스테이넘에게 결혼은 검토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도였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향해 실제로 몇 걸음 걸어갔지만, 끝내 그 문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스탠 포팅어

스탠 포팅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포팅어는 변호사이자 전직 법무부 관리였습니다. 포드 행정부 시절 법무부 민권국의 차관보급 인사, 즉 Assistant Attorney General for the Civil Rights Division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훗날 작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스테이넘과 포팅어의 관계는 짧은 로맨스가 아니었습니다. 공개 자료에서 그는 스테이넘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 장기 연인으로 설명됩니다. 스테이넘 본인도 한 인터뷰에서 포팅어와 9년 동안 함께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관계는 스테이넘이 남성과의 장기적 유대 자체를 거부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포팅어와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장기간 지속된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테이넘이 원했던 관계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보여줍니다. 법적 결혼과 전통적 부부 역할 없이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의 삶에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스테이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결혼의 대안적 형태에 가까웠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라는 제도적 역할 없이도 친밀함은 가능하고, 법적 종속 없이도 동반자 관계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해, 이런 관계도 아무에게나 쉬운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 독립, 사회적 인정, 개인의 이동성, 문화적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삶의 방식입니다.

모트 주커만

스테이넘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게 보이는 인물은 모트 주커만입니다. 그는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출판인이었고, 막대한 부와 언론 권력을 가진 남성이었습니다. 스테이넘이 평생 비판해 온 남성 중심적 성공의 상징, 즉 돈, 권력, 소유, 영향력을 모두 가진 인물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스테이넘은 바로 그런 남성과 수년간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독립적 여성의 상징이자 급진적 페미니즘의 대중적 얼굴이었던 그녀가, 전통적 남성 권력의 전형처럼 보이는 남성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스테이넘 자신도 이 관계가 자신에게 얼마나 부적절하게 느껴졌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면으로부터의 혁명: 자존감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너무나 맞지 않는 사람”에게 왜 사랑에 빠졌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이 지쳐 있었고, 과로했고, 삶의 가장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가 공항에 차를 보내 주고, 보호와 안락함을 제공하는 장면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스테이넘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 중요합니다. 로맨스 신화를 의심했던 그녀 자신도 로맨스의 힘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남성에게 자기 삶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그녀도, 어느 순간에는 강한 남성이 제공하는 보호감과 인정, 사치와 관심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관계를 결혼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주커만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고 보았지만, 스테이넘은 그와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이 자신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삼키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커만과의 관계는 스테이넘의 위선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가 비판했던 로맨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론적으로는 거부한 것을 감정적으로는 갈망할 수 있고, 머리로는 경계한 것을 몸과 마음은 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테이넘의 삶은 더 흥미로워집니다. 그녀는 로맨스 신화를 비판했지만, 로맨스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관계를 둘러싼 불임 클리닉 이야기는 조심해야 합니다. 당시 뉴욕 사교계에는 주커만이 아이를 원했고, 스테이넘이 그와 결혼하기 위해 불임 전문의를 찾아다녔다는 루머가 퍼졌습니다. 그러나 스테이넘은 이를 명백히 부인했고, 자신은 평생 불임 전문의를 찾아간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커만 역시 그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스테이넘의 삶을 설명하는 사실로 쓰기보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대중적 투사와 악성 소문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만 다루어야 합니다.

데이비드 베일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베일이 있습니다. 베일은 남아프리카 출생의 사업가이자 환경·동물권 활동가였고,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아버지였습니다. 스테이넘은 2000년 9월, 만 66세의 나이에 그와 결혼했습니다. 베일 역시 젊은 남성이 아니었습니다. 이 결혼은 젊은 여성의 생존 전략으로서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자기 삶을 구축한 두 사람이 선택한 늦은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젊은 시절의 결혼이 여성의 삶을 가정 안으로 흡수하는 제도였다면, 66세의 결혼은 이미 독립된 두 사람이 선택한 관계였습니다. 스테이넘은 결혼 제도를 비판해 왔지만, 자기 삶의 마지막 시기에는 그 제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만 그녀는 기존 결혼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하되, 그 결혼을 파트너십의 언어로 다시 쓰려 했습니다.

스테이넘의 결혼은 그래서 모순이면서 동시에 일관성입니다. 모순인 이유는 결혼을 오랫동안 비판한 사람이 결국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관성인 이유는 그녀가 비판한 것이 사랑이나 동반자 관계가 아니라, 여성을 종속시키는 결혼의 문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연대기로 본 스테이넘의 남성관계

스테이넘의 중요한 남성관계를 연대기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기인물관계의 성격핵심 포인트
1950년대 중반블레어 초치노프젊은 시절의 깊은 연애, 약혼 또는 결혼 직전 관계스미스칼리지 시절 친구 소개로 만난 남성입니다. 결혼 직전까지 갔지만, 스테이넘은 결혼이 자신의 삶을 닫는 선택처럼 느껴지고 떠났습니다.
1970년대 전후로버트 벤튼연인, 결혼 검토영화감독·시나리오 작가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단계적으로 검토했고, 혈액검사와 결혼 허가증까지 받았지만 결국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1980년대스탠 포팅어장기 연인, 이후 가까운 친구변호사·작가·전 법무부 공무원입니다. 스테이넘과 9년간 함께한 장기 연인으로 언급됩니다.
1980년대 중후반모트 주커만수년간의 연애뉴욕 부동산 개발업자·출판인입니다. 스테이넘은 2년, 주커만은 4년 관계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는 스테이넘에게 매우 논쟁적이었고, 그녀는 훗날 “나에게 너무 맞지 않는 사람”에게 끌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2000년데이비드 베일결혼남아프리카 출생 사업가·환경·동물권 활동가이며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아버지입니다. 스테이넘은 66세에 그와 결혼했습니다.

이 연대기를 보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스테이넘은 결혼 제도를 강하게 비판했지만, 남성과의 장기적 관계 자체를 거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남성과 깊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중 로버트 벤튼과는 결혼 허가증까지 받았고, 스탠 포팅어와는 9년간 함께했으며, 모트 주커만과는 수년간 관계를 가졌고, 데이비드 베일과는 66세에 실제로 결혼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사랑이나 남성을 거부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거부한 것은 결혼이 여성을 흡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테이넘을 단순히 “남성이 필요 없다고 말한 여성”으로 조롱하면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남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남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삶의 중심을 남성에게 넘겨주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스테이넘의 자유는 누구에게 가능한가

그러나 바로 여기서 질문은 스테이넘 개인의 일관성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조건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스테이넘은 결혼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고, 결혼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언어로 결혼을 다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유명했으며, 강력한 문화적 자본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남성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관계가 자신의 삶 전체를 흡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결혼은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아도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었고, 남편의 수입으로 생존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쓰고, 강연하고, 잡지를 만들고,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용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자유는 언제나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떠받치는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스테이넘은 그 기반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스테이넘의 삶은 매우 흥미롭지만, 그것을 모든 여성의 모델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에게 결혼의 거부는 선택의 확장이었지만, 모든 여성에게 결혼의 거부가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여성에게 결혼은 억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성에게 결혼과 가족은 불완전하더라도 생존의 안전망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벨 훅스의 비판이 중요해집니다.

벨 훅스의 비판: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보라

만약 보수주의자가 글로리아 스테이넘을 비평한다면, 아마도 그녀를 "대책 없는 로맨티스트"로 보았을 것입니다. 현실의 구체적인 생존 한계를 지운 채, 머릿속의 논리적 기획만으로 남녀관계를 설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뼈아픈 비판은 페미니즘 진영의 벨 훅스에게서 나왔습니다.

벨 훅스는 주류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경험을 여성 전체의 경험처럼 일반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스테이넘 같은 여성에게 결혼은 벗어나야 할 제도였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성, 명성, 경제적 기반, 문화적 자본을 가진 여성이었고, 결혼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흑인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인종차별, 빈곤, 불안정한 노동시장, 취약한 주거 환경 속에서 가족은 단순한 가부장적 억압 장치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때로 외부 세계의 폭력과 빈곤으로부터 자신과 아이들을 지켜내는 마지막 안전망이었습니다. "남편과 가족은 언제나 이상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삶의 위험을 함께 나누는 제도적·정서적 기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훅스의 비판은 스테이넘류 엘리트 페미니즘의 약점을 찌릅니다. 결혼과 가족을 주로 억압의 언어로만 말할 때, 그 제도가 약자에게 수행하던 생존 기능은 쉽게 지워집니다. 경제적·사회적 자원이 충분한 여성에게는 결혼의 거부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원이 부족한 여성에게 가족의 약화는 자유가 아니라 고립과 빈곤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벨 훅스가 보기에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여성을 묶어서는 안 됩니다. 여성의 경험은 인종, 계급, 가족 구조, 교육, 노동시장, 지역, 공동체의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가정은 억압의 공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흑인 여성 and 하층 여성에게 가정은 외부의 더 큰 폭력으로부터 버티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물론 훅스가 전통적 가부장제를 옹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는 흑인 공동체 내부의 성차별 and 남성 중심성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이 가족을 너무 쉽게 억압의 장치로만 해석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가족은 억압의 공간일 수 있지만, 동시에 생존의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복합성을 지우면 페미니즘은 약자의 현실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스테이넘이 틀렸다는 단순한 결론이 아닙니다. 그녀의 페미니즘은 어떤 여성들에게는 해방의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모든 여성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벨 훅스가 지적한 것은 바로 이 차이입니다. 백인 엘리트 여성의 자유가 흑인 여성과 하층 여성의 현실을 대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억압인가, 안전망인가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과거의 결혼과 가족 제도가 완벽하거나 항상 바람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당시의 가혹한 생존 환경입니다. 전근대 사회의 아이들은 질병, 굶주림, 범죄, 교육 부족, 자연재해, 전쟁 등 온갖 실존적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자식을 안전하게 길러내기 위해 평생 평균 6명의 자녀를 낳아야 했고, 그중 2-3명만이 겨우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지극히 취약한 시기에 자신과 자녀를 보호해 줄 물리적·경제적 안전망으로서 남편의 역할은 필수적였으며, 가부장적 가족 구조는 바로 이러한 생물학적 필연성 위에 구축된 생존 장치였습니다. 반면 현대에 이르러 영아 사망률이 비약적으로 낮아지고 합계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여성들은 비로소 강제적인 출산과 양육의 부담에서 벗어나 대거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통적 결혼과 가족 제도에는 분명 억압이 존재했습니다. 여성의 법적 권리, 재산권, 교육 기회, 직업 선택권은 오랫동안 제한되었습니다. 많은 사회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남편의 성을 따르고, 남편의 직업과 지역 이동에 맞추고, 자신의 욕망보다 가족의 요구를 우선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테이넘의 비판은 정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생존 자체가 지상 과제였던 시대의 보통 여성들에게는 가부장적 억압보다 당장의 굶주림과 위험을 막아줄 가족의 보호막이 훨씬 더 절박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임 기술이 발달하고 삶의 안전망이 고도화된 스테이넘의 시대에 이르러, 특히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들에게 결혼은 더 이상 생존의 필수 조건이 아닌, 개인의 자유로운 '로맨스 영역'으로 보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역사적으로 결혼은 단순한 로맨스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자식을 낳아 기르기 위한 생물학적 본능과 생존 투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가족은 오직 억압 장치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국가 복지가 약하고, 노동시장이 불안정하며, 아이를 키우는 비용이 개인과 가족에게 집중되는 사회에서 가족은 생존의 기본 단위였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개인의 낭만적 선택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경제적 위험, 질병, 실직, 주거 불안, 교육비, 돌봄 부담은 모두 가족 안에서 분담되어 왔습니다.

이 점에서 가족의 약화는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부유한 여성은 가족이 약해져도 시장에서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돌봄을 외주화할 수 있고, 주거를 확보할 수 있으며, 법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혼자서도 아이의 교육 기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여성은 다릅니다. 가족이 약해지면 곧바로 돌봄 공백, 소득 불안, 주거 불안, 아이의 교육 격차가 현실이 됩니다.

스테이넘식 독립은 강한 개인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사람은 그렇게 강한 개인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의존적인 존재이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두 사람 이상의 장기적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결혼 제도가 불완전하고 불평등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수행하던 기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보수주의가 오래된 제도를 쉽게 해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는 대개 완벽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결혼과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는 억압과 불평등이 있었지만, 동시에 출산, 양육, 부양, 상속, 돌봄, 위험 분담이라는 기능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전통 가족의 무비판적 복원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그 제도가 수행하던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입니다. 결혼이 여성을 종속시켰다면 그 종속은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이 아이와 약자를 지키는 안전망으로 기능했다면, 그 기능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지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념이라는 사치

이념은 종종 현실보다 아름답습니다. 이념은 선명하고, 단순하고, 강력합니다. “여성은 남성 없이도 살 수 있다.” “결혼은 억압이다.” “로맨스는 여성을 속이는 신화다.” 이런 말들은 특정한 현실에서는 해방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테이넘의 삶은 페미니즘의 힘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여성들이 자기 삶을 다시 상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 자기 이름으로 말하고 쓰고 행동하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중요한 성취입니다.

그러나 벨 훅스의 비판은 그 힘의 한계도 보여줍니다. 자유는 언제나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실제 삶에서 작동하려면 경제적 기반, 사회적 안전망, 아이를 함께 키울 책임 구조가 필요합니다. 스테이넘에게 결혼의 거부는 선택의 확장이었지만, 흑인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에게 가족의 약화는 때로 선택의 확장이 아니라 생존 기반의 약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성이 만드는 이념은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순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그것이 “이념이라는 사치”의 작동 방식입니다. 사회적 자원이 충분한 사람은 제도를 거부해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돈과 명성, 교육과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은 가족이 없어도 시장과 공동체의 그늘 아래에서 자기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원이 없는 사람에게 가족은 여전히 가장 무겁고 실체적인 안전망입니다. 그 안전망을 억압이라는 이름으로만 해석하고 해체할 때, 가장 큰 비용을 치르는 사람은 엘리트가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놓인 사람, 빈곤과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비용을 고스란히 치르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이 전통적 가부장제를 미화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폭력을 참게 만들고, 경제적 의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결혼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과 가족을 오직 억압의 언어로만 말하는 것도 현실을 왜곡합니다. 가족은 억압이면서 동시에 보호였고, 통제이면서 동시에 협력이었으며, 불평등이면서 동시에 생존의 장치였습니다.

스테이넘은 이 복잡한 현실 중 하나의 면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결혼이 여성을 흡수하는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그 비판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벨 훅스는 다른 면을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가족이 약자에게 수행하던 생존 기능, 백인 중산층 여성의 자유가 흑인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의 현실을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스테이넘과 훅스의 차이는 페미니즘 내부의 작은 논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와 안전망의 문제입니다. 강한 개인에게 자유는 제도를 거부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한 개인에게 자유는 때로 안정된 관계, 책임지는 가족, 아이를 함께 키우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만 현실이 됩니다.

스테이넘의 결혼식은 아름답고 상징적이었습니다. 오클라호마의 새벽, 원주민 여성 지도자의 집, 파트너라는 새로운 명칭, 기존 결혼의 상징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분명 큰 울림을 줍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동시에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그렇게 결혼의 언어를 마음대로 다시 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이 질문에 온전히 답하지 못할 때, 엘리트의 화려한 해방 언어는 약자의 거친 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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