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 살펴본 포스트 진보는 왜 보수를 냉정하다고 믿는가?에서는 리버럴 작가 개리슨 케일러의 시선을 통해 보수주의자를 '불친절하고 무정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진보의 도덕 프레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맞서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리버럴의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반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버드 크림슨에 실린 보수의 목소리: "우리를 고정관념으로 보지 말라"
2004년 4월 29일, 하버드대 학생신문 《하버드 크림슨》(The Harvard Crimson)에는 마크 A. 아도마니스(Mark A. Adomanis)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No Conspiracy Here: Conservatives at Harvard should not be typecast」, 즉 “음모는 없다: 하버드의 보수주의자들을 고정관념으로 보지 말라”입니다. 이 글은 케일러식 리버럴 시선에 대한 훌륭한 반론을 제시합니다.
아도마니스는 한 친구가 자신에게 던진 농담 섞인 고백을 소개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너는 보수 공화당원일 수 없어. 너는 그렇게 냉혹한 사람이 아니잖아!(You can’t be a conservative Republican; you’re not heartless!)” 이 말은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하버드 대학 내의 리버럴 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힌 지독한 편견을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입니다. 즉, 많은 리버럴 학생들이 보수주의자를 입체적인 개인으로 보지 않고, “거대한 우익 음모”의 추종자나 폭스뉴스의 맹종자, 혹은 무정한 사람 정도로 단순하게 뭉뚱그려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아도마니스가 지적하는 불만은 구체적입니다. 하버드에서 보수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생각만 밝히고 학업에 전념하는 일이 아닙니다. 보수 학생들은 앤 콜터, 빌 오라일리, 러시 림보 등 유명 우파 인사들의 자극적인 발언까지 대신 해명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습니다. 누군가 “그 우파 인사의 말은 너무 편협한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순간, 한 학생의 개별적인 지성은 지워지고 보수 진영 전체를 대변해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리버럴 학생들은 이러한 연대책임의 압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이 노엄 촘스키나 알 프랑켄 같은 진보계 인사들의 모든 발언을 대신 해명하며 곤혹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도마니스가 고발하는 비대칭성입니다. 그가 보기에 문제의 본질은 “보수주의자는 모두 같다”는 리버럴의 게으른 착각에 있습니다. 실제 보수주의는 단일한 교리나 의견 덩어리가 아니며, 마약 합법화, 이민, 동성혼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자는 마리화나 합법화에 찬성할 수 있지만 사회보수주의자는 완강히 반대합니다. 또한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경제적 보수는 성장을 위해 이민 확대를 옹호하는 반면, 《내셔널 리뷰》 같은 문화적 보수는 공동체 동화를 위해 이민 제한을 주장합니다. 이처럼 보수주의 내부의 다양성은 리버럴만큼이나 큽니다. 그럼에도 리버럴이 이 차이를 무시하고 보수를 하나의 이기적인 집단으로 묶어버린다면, 그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라 또 다른 편견에 불과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편견이 상대방을 “거대한 우익 음모”의 음흉한 하수인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직결된다고 봅니다. 이 시각에서는 보수주의를 단순한 '다른 의견'이 아닌 '도덕적으로 잘못된 신념'으로 보기 때문에, 보수 학생을 토론에서 배제하고 침묵시키는 행위가 손쉽게 정의로 포장됩니다. 아도마니스는 세금이 본질적인 도덕적 선이라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았다다는 이유만으로, 세미나 수업에서 주변 학생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던 경험을 회상합니다.
이것은 리버럴 진영의 맹점을 폭로하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스스로를 가장 관용적이고 열린 사람이라 믿는 이들이, 자신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도덕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토론의 상대가 아닌 '도덕적 결함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도마니스는 하버드의 리버럴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입버릇처럼 말하는 개방성, 관용, 그리고 다원주의를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실천하라고 엄중히 요구합니다.
이 반론은 앞선 케일러의 보수 비판을 보완하는 중요한 균형추입니다. 케일러의 에세이는 리버럴이 보수주의자를 '친절과 연대를 저버린 냉정한 이기주의자'로 규정하는 프레임을 선명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도마니스는 바로 그 도덕적 낙인찍기야말로 리버럴의 독단적 위선임을 역설합니다.
물론 리버럴 진영이 보수에게서 차가움을 느끼는 정책적 배경이 실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복지 정책의 축소, 성소수자 관련 담론 유보, 엄격한 이민 통제 등은 리버럴의 눈에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혹함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이러한 정책들을 전혀 다른 가치의 언어로 옹호합니다. 복지 확대를 경계하는 것은 가난한 이에 대한 냉대가 아니라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개인의 자립적 책임, 그리고 비대해지는 국가 의존성의 위험을 막기 위한 판단입니다. 전통적 질서를 강조하는 것 역시 단순한 배타성이 아니라, 공동체 규범이 붕괴될 때 발생할 사회적 비용에 대한 깊은 염려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두 시각을 교차해 읽으면 정치적 갈등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리버럴은 보수를 "친절하지 못한 냉혈한"으로 보고, 보수는 리버럴을 "자신만 정의롭다고 믿으면서 반대편을 손쉽게 악마화하는 위선자"로 규정합니다. 리버럴은 자신이 고통에 즉각 반응하는 선량한 이라 믿고, 보수는 자신이 현실과 법과 질서를 지키는 책임 있는 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리버럴의 보수는 '잔인함'이 되고, 보수의 리버럴은 '위선'이 됩니다.
이 비대칭적 적대감은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도 정확히 반복됩니다. 진보 진영은 자신을 약자, 인권, 평등, 연대의 언어로 독점 포장하고, 보수 진영은 흔히 기득권, 성장주의, 반공주의의 차가운 이미지로 낙인찍힙니다. 그 결과 보수는 구체적인 대안과 정책을 설명하기도 전에 "부자 감세", "민생 외면"이라는 도덕적 심판을 먼저 받습니다. 반대로 보수는 진보를 향해 선의는 요란하지만 실질적 책임감은 없고, 과정의 평등을 외치면서 정작 정책이 낳을 장기적인 부작용은 계산하지 못하며,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가차 없이 배제하는 위선적 집단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로 인해 정책의 실효성을 따지는 건강한 논쟁은 순식간에 진영 간의 인격 심판대로 전락합니다. 복지 재원의 적정 비율을 따지는 토론은 "약자를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의 도덕극이 되고, 세율을 논하는 자리는 "탐욕스러운가 청렴한가"를 가르는 종교 재판이 됩니다.
그러나 정치는 도덕적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영역입니다. 한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그의 도덕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지 과잉을 경계한다고 해서 모두 무정한 부자가 아니며, 규제 완화를 지지한다고 해서 모두 이기주의자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배를 중시한다고 해서 모두 국가 재정을 탕진하려는 무책임한 선동가는 아닙니다.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갈등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이 어떤 도덕적 프레임으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합니다. 케일러의 글과 아도마니스의 칼럼은 두 진영이 서로에 대해 품은 깊은 오해의 구조를 완벽하게 대조해 보여줍니다. 리버럴이 관찰한 보수는 친절이 결여된 자이고, 보수 학생이 관찰한 리버럴은 다원주의를 외치며 반대파에게 고정관념의 굴레를 씌우는 자입니다.
오늘날 정치 양극화가 이토록 처절한 이유는 단순히 구체적인 법안이나 정책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인격과 도덕성 전체에 대해 이미 단죄의 판결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도덕적 단죄가 끝나면, 상대의 합리적인 비판이나 대안은 주장이 아닌 구차한 변명으로 폄하됩니다.
정치적 대화가 마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상대를 냉혈한이나 위선자로 처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민주주의와 생산적인 정치 토론은 상대를 도덕적으로 말살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떤 현실의 우려와 신념의 체계를 가지고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직하게 경청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상대의 정치적 입장을 비판할지언정, 그의 도덕성을 단정 지어 배제하는 순간 정치는 공론장이 아닌 파멸의 전쟁터가 될 뿐입니다.
리버럴이 씌우는 도덕적 고정관념(불친절함, 이기주의)과 실제 개인의 기부 및 자원봉사 실천 데이터를 대조하여 추적한 흥미로운 후속 연구는 누가 정말 남을 돕는가? 포스트에서 더욱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 Mark A. Adomanis, "No Conspiracy Here: Conservatives at Harvard should not be typecast", The Harvard Crimson, 2004. 4. 29. 주의자는 친절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받은 도움은 잊고, 남이 받을 도움은 막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도마니스는 바로 그 시선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보수주의자는 반드시 냉혹한 사람이 아닙니다. 보수주의자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앤 콜터나 러시 림보의 발언을 자동으로 대표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 내부에는 자유지상주의자도 있고, 사회보수주의자도 있고, 시장주의자도 있고, 종교적 보수주의자도 있고, 공동체주의적 보수주의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수를 하나의 도덕적 결함으로 환원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물론 이것은 케일러의 비판이 전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리버럴이 보수에게서 냉정함을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복지 삭감, 약자 보호 축소, 성소수자 반대, 이민자 배제 같은 정책은 리버럴의 눈에 매우 냉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그 정책을 다른 언어로 이해합니다.
복지 확대를 반대하는 것이 반드시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아닙니다. 그것은 재정의 지속가능성, 개인 책임의 약화, 국가 의존성의 확대를 우려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전통을 강조하는 것도 단순한 혐오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안에는 공동체 규범과 사회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이 섞여 있습니다.
결국 케일러와 아도마니스의 글을 함께 읽으면,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 보입니다.
리버럴은 보수를 “친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봅니다. 보수는 리버럴을 “자신만 관용적이라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보수를 악마화하는 사람”으로 봅니다.
리버럴은 자신을 약자와 고통에 반응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보수는 자신을 현실과 질서와 책임을 보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눈에는 다르게 보입니다.
리버럴의 눈에 보수는 냉정합니다. 보수의 눈에 리버럴은 위선적입니다.
한국 정치에서도 이 구조는 반복됩니다.
진보는 자신을 약자, 인권, 평등, 연대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보수는 종종 기득권, 냉정함, 성장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의 이미지로 묶입니다. 그래서 보수는 정책을 설명하기도 전에 “부자 편”, “냉정한 사람”, “약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먼저 받습니다.
반대로 보수는 진보를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봅니다. 선의는 많지만 책임은 약하고, 평등을 말하지만 결과의 부작용은 보지 못하며, 관용을 말하지만 자기와 다른 생각에는 관용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정책 논쟁은 쉽게 인격 논쟁이 됩니다.
복지를 얼마나 확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는 약자에게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세금을 얼마나 올릴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됩니다. 가족과 성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는 혐오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정치적 입장은 그 사람의 도덕성 전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복지 확대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냉혹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민 확대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외국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동성혼에 유보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잔인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를 확대하자고 해서 반드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민자 권리를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가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족을 해체하려는 사람은 아닙니다.
정치적 갈등을 이해하려면, 먼저 상대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케일러의 글은 리버럴이 보수를 어떻게 보는지 보여줍니다. 아도마니스의 글은 보수가 그 시선을 얼마나 부당하게 느끼는지 보여줍니다. 두 글을 함께 읽어야 정치적 오해의 구조가 보입니다.
한 리버럴이 바라보는 보수주의자는 친절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보수 학생이 바라보는 리버럴은 관용을 말하면서 보수를 고정관념으로 몰아넣는 사람입니다.
이 간극이 바로 오늘날 정치 양극화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정책만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논쟁은 설득이 아니라 판결이 됩니다.
그리고 한번 판결이 내려지면, 상대의 말은 더 이상 주장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변명으로 들립니다.
정치적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정책을 듣기 전에, 이미 상대의 인격을 평가해버립니다. 리버럴은 보수를 냉정한 사람으로 보고, 보수는 리버럴을 위선적인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좋은 정치 논쟁은 상대를 도덕적으로 제거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려는 데서 시작됩니다.
케일러의 글은 리버럴의 도덕적 분노를 보여줍니다. 아도마니스의 글은 그 도덕적 분노가 보수에게는 어떻게 낙인으로 느껴지는지 보여줍니다. 두 글 사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상대의 정치적 입장을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정치는 토론이 아니라 배제가 됩니다.
리버럴이 씌우는 도덕적 고정관념(불친절함, 이기주의)과 실제 개인의 기부 및 자원봉사 실천 데이터를 대조하여 추적한 흥미로운 후속 연구는 누가 정말 남을 돕는가? 포스트에서 더욱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 글
https://www.thecrimson.com/article/2004/4/29/no-conspiracy-here-you-cant-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