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균은 한국사에서 매우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적서 차별의 부조리를 문학적으로 드러냈으며, 경직된 유교 질서 밖의 세계를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시대를 앞선 천재, 자유로운 지식인,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선 문인으로 기억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허균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불의한 사회를 비판한 사람이 언제나 정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차별을 본 사람이 반드시 법치를 존중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정치적 인간은 노골적인 악인이 아니라, 정의의 언어로 법과 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허균을 볼 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찬양이 아닙니다. 그가 본 조선의 모순을 인정하되, 그 모순을 이유로 법을 넘어서는 상상력까지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와 반대의 문제
1938년 영화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Angels with Dirty Faces)》에는 범죄자이지만 소년들의 우상이 된 갱스터 로키 설리번이 등장합니다. 그는 범죄자였지만,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강인함 and 반항의 상징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범죄자를 영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범죄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라 삶의 모델이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로키는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친구인 신부 제리는 그에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아이들이 더 이상 갱스터를 숭배하지 않도록, 죽음 앞에서 비겁한 모습을 보여 달라는 부탁입니다. 로키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마지막 순간 무너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이들은 그가 겁쟁이처럼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혼란에 빠집니다. 그의 영웅적 이미지는 무너집니다. 이 장면이 영화의 도덕적 핵심입니다.
로키는 더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신화를 스스로 부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허균의 경우는 반대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허균은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였을까요. 아니면 천사의 얼굴을 한 무법자였을까요.
허균은 차별받는 자의 언어를 가졌습니다. 그는 불의한 질서를 비판하는 언어를 가졌습니다. 그는 시대를 앞선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곧 법치의 언어였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법을 존중하지 않을 때, 그 정의는 언제든 새로운 폭력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허균의 매력은 부정할 필요가 없다
허균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의 통찰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허균은 분명 조선 사회의 모순을 보았습니다. 적서 차별, 신분 질서, 경직된 명분론은 조선 사회의 깊은 병폐였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출신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홍길동전》이 오랫동안 읽힌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홍길동은 억울한 사람입니다. 그는 능력이 있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제도 안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인물의 분노는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줍니다.
이 점에서 허균의 문제의식은 가볍지 않습니다. 그는 조선 사회가 외면하던 균열을 보았습니다. 문학은 때로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상처를 드러냅니다. 허균은 바로 그런 상처를 문학적으로 포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억울함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이 곧 무법의 권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차별받았다는 사실이 곧 법 바깥에서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사회의 모순을 보았다는 사실이 곧 질서의 전복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의적 서사의 위험
홍길동은 문학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부패한 권력을 응징하고, 약자를 돕고, 기존 질서 바깥에 새로운 세계를 세웁니다. 독자는 그에게서 통쾌함을 느낍니다. 기존 질서가 부정의하다면, 그 질서를 뛰쳐나가는 인물은 쉽게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법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지점이 가장 위험합니다.
홍길동은 법 밖에서 움직입니다. 그는 스스로 정의를 판단하고, 스스로 처벌하며,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세웁니다. 문학 속에서는 이것이 의적의 매력입니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이런 방식은 법치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의적은 문학 속에서는 통쾌하지만, 현실에서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의적의 정의는 제도적 검증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고 부르고, 자신의 폭력을 응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폭력은 자기 나름의 명분을 가집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은 완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정의감에 쉽게 취합니다.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자기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는 그것을 역사적 정의, 민중의 심판, 시대의 요구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허균과 홍길동의 낭만화는 위험해집니다. 차별을 비판하는 서사가 법 바깥의 폭력을 미화하는 순간, 독자는 법치보다 감정적 정의에 끌리게 됩니다.
허균은 순수한 희생자였는가
허균의 죽음 역시 단순하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1618년 광해군 대에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 자료에 따르면, 허균은 형신도 받지 않고 결안도 없이 사형을 당했으며, 그 뒤 조선시대 내내 역적이라는 이름을 벗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의 거사 계획이 확실하지 않아 실제로 어떤 방식의 혁명을 꿈꾸었는지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 줍니다.
첫째, 허균의 처형은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적법한 절차 없이 정치적으로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허균은 조선 정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허균을 곧바로 순수한 민주주의자나 무고한 개혁가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의 정치적 구상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어느 정도까지 전복을 꿈꾸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인물을 후대의 욕망에 맞춰 선각자로 포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허균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순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법 위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조선의 법이 불완전했다고 해서, 법 자체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이 곧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치는 왜 중요한가
법치의 가치는 법이 언제나 정의롭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법이 불완전할 수 있고, 권력이 법을 악용할 수 있으며, 인간이 자기 정의감에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법치가 필요합니다.
법치란 단순히 현행법을 무조건 따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한 법은 고쳐야 합니다. 차별적인 제도는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 역시 법과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쉽게 폭력으로 변합니다.
역사에서 많은 정치적 폭력은 정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부패한 권력을 응징한다는 명분,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한다는 명분,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명분은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그 명분이 법과 절차를 무너뜨리면, 그 뒤에 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지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악의 언어가 아닙니다. 악의 언어는 비교적 알아보기 쉽습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선의 언어입니다. 정의, 해방, 평등, 민중, 개혁이라는 말은 사람을 쉽게 무장해제시킵니다. 그 말들이 법을 넘어설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엄격하게 보아야 합니다.
허균을 낭만화하지 말아야 한다
허균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 사회의 위선을 드러냈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분노를 문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점에서 그는 기억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균을 성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를 시대를 앞선 천재로만 보는 것도 부족합니다. 허균은 법과 질서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의 모순을 보았지만, 그 모순을 넘어서는 방식이 과연 법치의 길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의 로키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를 부쉈습니다. 아이들이 범죄자를 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경우, 후대는 오히려 그의 불온한 이미지를 낭만화해 왔습니다. 차별에 저항한 천재, 시대를 앞선 사상가, 억압받는 자의 대변자로 소비해 왔습니다.
물론 그런 평가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시대에는 반항자가 쉽게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반항이 언제나 정의는 아닙니다. 법을 넘어선 정의는 언제든 새로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허균을 읽을 때 필요한 것은 찬양이 아니라 경계심입니다.
허균은 조선의 위선을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위선적이었다는 사실이 허균의 모든 상상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불의한 법은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법 자체를 조롱하는 정치적 낭만주의는 결국 더 큰 폭력을 부릅니다.
허균의 위험성은 그가 악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선한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위험했습니다. 법치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언제나 악마의 얼굴로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천사의 얼굴로 옵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허균 (역모 혐의로 처형되다).” 인물 교과서 자료. 우리역사넷 링크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8월 24일 기사.
Curtiz, Michael, dir. Angels with Dirty Faces. Produced by Sam Bischoff. Warner Bros., 1938.
허균. 《홍길동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