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를 고기처럼 본다”는 말의 강렬함
캐롤 J.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는 매우 강렬한 상징으로 기억되는 책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여성의 몸을 소고기 부위처럼 나눈 그림이 등장합니다. 갈비, 허리, 엉덩이, 다리처럼 여성의 몸이 부위별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애덤스의 핵심 주장을 한 장으로 압축한 상징입니다.
그 주장은 대략 이렇습니다. 동물은 살아 있는 존재였지만, 도축과 소비의 언어 속에서 고기 부위로 바뀝니다. 소는 더 이상 소가 아니라 등심, 안심, 갈비, 사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성도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가슴, 허리, 엉덩이, 다리 같은 신체 부위로 분절되어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강렬합니다. 그래서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렬한 비유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지만, 동시에 현실 전체를 과도하게 단순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남성의 시선인가, 여성의 느낌인가
이 표지를 처음 보면 마치 애덤스가 “남성은 여성을 고기처럼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남성이 여성을 실제로 그렇게 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여성들이 남성의 시선을 그렇게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호감이나 관심, 연애 가능성의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남성이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을 곧바로 인격의 삭제나 폭력적 소비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자신을 한 사람으로 대하면서 동시에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평가, 침해, 소비, 분절의 시선으로 느낍니다. 남자가 자신을 볼 때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몸의 일부, 젊음, 외모, 성적 기능을 먼저 본다고 느낍니다. 이런 여성에게 애덤스의 표지는 매우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나는 사회가 나를 이렇게 본다고 느껴왔다”는 감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남성의 시선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남성의 시선을 여성들이 어떻게 예측하고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애덤스의 이론은 약해집니다.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한마디
애덤스의 이론은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의 감정을 요청합니다. “나는 남성의 시선 속에서 분절되고 소비된다”고 느끼는 순간, 이 이론은 매우 강력해집니다. 여성의 몸과 고기 부위의 비유는 그 감정을 이미지로 고정하고, 그 뒤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이 이론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입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느끼는가. 남성의 관심을 곧바로 도구화와 소비의 시선으로 경험하는가. 이 질문을 건너뛰면, 독자는 애덤스의 이론이 설명하는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착각한 채 그 이론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애덤스의 이론은 여성의 경험을 말하는 듯합니다. 여성은 남성 중심 문화 속에서 대상화되고, 고기처럼 분절되고,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성의 경험에 기대고 있는 만큼, 여성의 다른 경험 앞에서 쉽게 흔들립니다.
어떤 여성이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이 한마디는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애덤스의 보편화에 대한 반례입니다. 만약 애덤스가 말하는 구조가 여성 일반의 경험이라면, 많은 여성들이 남성의 시선을 그런 식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여성들이 “나는 남성의 관심을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이론은 더 이상 여성 보편의 이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때 애덤스의 이론은 이렇게 좁혀져야 합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고기처럼 대상화된다.
이 문장은 너무 강합니다. 더 정확한 문장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어떤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자신을 고기처럼 분절하고 소비하는 시선으로 느낀다.
이 두 문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첫 번째 문장은 사회 전체에 대한 선언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특정한 감수성과 경험에 대한 설명입니다. 애덤스의 책은 첫 번째 문장처럼 읽히지만, 실제로 방어 가능한 것은 두 번째 문장에 가깝습니다.
반대 경험을 가진 여성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어떤 여성이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면, 강한 페미니즘 이론은 종종 그 여성을 다시 해석하려 합니다. “당신은 아직 가부장제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했다”, “당신은 남성 중심 문화를 내면화했다”, “당신은 자신의 억압을 모른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이론이 여성의 경험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을 대신 판정하는 권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중시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여성이 이론과 다른 경험을 말하면 그 경험을 무효화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론은 반증 가능성을 잃습니다. 여성이 “나는 대상화되었다고 느낀다”고 말하면 이론의 증거가 됩니다. 여성이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여성은 구조를 모르는 사람으로 처리됩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어떤 경험도 이론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이론은 강한 이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닫힌 이론입니다.
리버럴 성 담론의 역설
그렇다면 애덤스의 비유는 어떤 담론적 공간에서 가장 강하게 힘을 얻고, 또 동시에 한계를 드러낼까요. 바로 남성의 시선을 처음부터 권력과 소비의 언어로 해석하는 성 담론 안에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감각이 반드시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일부 리버럴 여성들에게서 남성의 시선을 더 강하게 경계하고, 더 쉽게 소비와 침해의 언어로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리버럴은 성적 자유, 개인의 선택, 신체 자기결정권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남성의 시선이나 성적 관심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리버럴 담론은 전통적 규범을 억압으로 보고 해체합니다. 하지만 규범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녀 관계는 반드시 더 편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시선, 말, 농담, 호감, 욕망이 권력관계의 언어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성적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 감각은 해방보다 경계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리버럴 성 담론의 역설입니다. 자유를 강조하지만, 관계를 더 자유롭게 만들기보다 더 의심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남성의 시선은 호감이 아니라 감시가 되고, 매력의 표현은 소비의 기호가 되며, 연애의 긴장은 권력의 문제로 바뀝니다.
성적 욕망과 대상화는 다르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적 욕망 자체와 대상화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 몸, 목소리, 태도, 분위기에 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대상화라고 부르면 인간의 연애와 사랑은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것이 됩니다.
문제는 성적 욕망이 상대의 인격을 지울 때입니다. 상대를 하나의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체 부위나 기능으로만 볼 때입니다. 그런 시선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광고, 포르노, 일부 대중문화, 그리고 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서 그런 시선은 분명히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성 일반은 아닙니다. 남성의 시선 일반도 아닙니다. 육식 문화 일반도 아닙니다. 애덤스의 표지는 그런 병리적 시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인간 보편의 구조로 확장하는 순간 과장됩니다.
이 책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따라서 『육식의 성정치』는 남성이 여성을 실제로 어떻게 보는가를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일부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하는가를 보여주는 책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책은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여성들이 왜 남성의 시선을 불편하게 느끼는지, 왜 성적 관심을 곧바로 소비와 침해의 언어로 해석하는지, 왜 동물권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이 쉽게 결합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 이론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여성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모든 남성이 그렇게 보는 것도 아니며, 육식이 곧 여성 억압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이 책의 가장 약한 지점은 단순합니다.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이 한마디 앞에서 이론은 겸손해져야 합니다. 어떤 여성의 경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여성의 경험이 모든 여성의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성의 시선을 폭력적 소비로 느낀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남성이 여성을 신체 부위로만 본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그렇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결론: 감수성의 이론을 보편 이론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캐롤 애덤스의 표지는 강렬합니다. 그것은 여성을 신체 부위로 분절하는 문화적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그런 시선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성이 보편적으로 그렇게 경험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그렇게 느낍니다. 어떤 여성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애덤스는 개인 여성의 감정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구조를 지적한 것이라고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조적 지적이 여성의 보편적 경험이라는 포장을 입고 소비될 때, 이론은 다양한 여성의 경험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경험을 선별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권위가 됩니다.
문제는 남성 일반이 아닙니다. 문제는 남성의 시선을 언제나 소비와 침해로 해석하게 만드는 특정한 경험과 담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성 전체의 경험인 것처럼 말하는 순간, 페미니즘은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목소리를 선별하는 이론이 됩니다.
『육식의 성정치』는 인간 보편의 진실을 말한다기보다, 특정한 감수성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것을 문학적 상징이나 심리적 증언으로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사회이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여성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애덤스, 캐롤 J. (2018). 『육식의 성정치』(한재훈 역). 서울: 피시스북. Adams, Carol J. (1990). The Sexual Politics of Meat: A Feminist-Vegetarian Critical Theory. New York: Continu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