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암 촘스키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굉장히 특이합니다. 미국에서는 그가 반체제 지식인, 양심적 지식인, 제국주의 비판자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과 분단의 현실을 역사적 기억으로 가진 사람에게 촘스키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비판했습니다. 펜타곤과 군산복합체를 악의 중심처럼 묘사했습니다. 자본주의와 주류 언론을 거대한 세뇌 장치로 보았습니다. 미국 선거제도와 언론 자유도 근본적으로 의심했습니다. 그의 세계에서는 미국의 힘이 세계 곳곳의 억압과 폭력의 핵심 원인처럼 등장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말은 단순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현대사는 미국의 힘을 그렇게 단순한 악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은 추상적인 국제정치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제 전쟁이었습니다. 북한군이 남침했고, 중공군이 개입했으며, 수많은 한국인이 죽었습니다. 서울은 함락되었고, 국가는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미국과 유엔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미국은 복잡한 존재입니다. 비판할 수 있습니다. 잘못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의 생존과 자유민주주의의 하드웨어를 지탱한 결정적 힘이기도 했습니다. 이 현실을 지운 채 미국을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도덕적 단어로만 설명하면, 그것은 한반도의 피비린내 나는 경험을 너무 쉽게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촘스키는 왜 매력적이었나
촘스키가 매력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복잡한 세계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세상의 억압과 폭력은 어디서 오는가. 미국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기업 언론, 펜타곤, 군산복합체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젊은 지식인에게 강력합니다. 특히 권위에 반감을 가진 사람, 국가 권력과 군사주의를 의심하는 사람, 세상의 부조리를 한 번에 설명하고 싶은 사람에게 촘스키는 매우 매력적인 지식인입니다. 그는 분노할 대상을 제공하고, 동시에 자신이 도덕적으로 깨어 있다는 감각도 제공합니다.
이것이 촘스키의 힘입니다.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종의 도덕적 해설자였습니다. 미국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지적 권위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라, 주류 사회의 거짓을 간파했다는 정체성을 얻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촘스키는 대학가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반전운동,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언론 비판,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주제는 모두 젊은 지성에게 매력적인 언어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미국 내부의 반체제 인사처럼 위치시켰고, 많은 이들은 그를 미국의 양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촘스키의 정치적 태도는 그의 언어학적 방법론과도 깊은 일관성을 가집니다. 그는 학문 세계에서 구체적인 언어 발달 자극이나 생물학적 조건보다 선험적이고 추상적인 내재 구조인 "보편문법"을 선언적으로 내세웠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치 담론 역시 구체적인 지정학적 현실이나 역사적 데이터보다는 "미국은 악"이라는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이념 구도를 먼저 설정한 뒤 모든 현실을 그에 맞추어 끼워 맞추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정치적 태도 기저에는 경험적 현실의 복잡성보다 자기 이론의 합리성을 우선시하는 "합리주의적 편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는 정말로 체제 밖의 인물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유로운 미국 체제 안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반체제 브랜드였을까요?
반체제의 성자는 어디에서 만들어졌나
촘스키는 미국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적 권위와 대중적 성공은 바로 그 미국 체제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미국의 표현의 자유 속에서 미국을 비판했습니다. 출판 시장은 그의 책을 팔았고, 강연 시장은 그의 발언에 가격을 매겼습니다. 저작권 제도는 그의 지식 상품을 보호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롱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 사회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자유 사회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도 허용합니다. 심지어 그 비판자를 스타로 만들기도 합니다. 촘스키가 미국을 강하게 비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이 소련이나 북한과 같은 체제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촘스키가 이 점을 충분히 인정했는가입니다.
그는 미국 체제가 제공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체제를 억압과 세뇌와 제국의 언어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미국 대학과 출판 시장, 강연 시장, 저작권 제도, 표현의 자유 위에서 성장했지만, 그 기반을 가능하게 한 질서와 제도의 가치는 충분히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눈에 촘스키가 특이하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유는 말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자유에는 군사적 억제력, 국가의 생존, 법질서, 동맹, 제도, 경제력이라는 하드웨어가 필요합니다.
촘스키는 자유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자유를 가능하게 한 하드웨어를 너무 쉽게 악으로 돌렸습니다.
반자본주의도 시장에서 팔린다
촘스키의 또 다른 역설은 그가 반자본주의의 대표적 지식인이면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매우 성공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책은 팔렸습니다. 그의 강연은 청중을 모았습니다. 인터뷰는 책이 되었고, 강연 녹취록은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출판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성이 되었습니다. 촘스키라는 이름이 붙으면 독자가 반응했습니다. 반미,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라는 메시지도 시장에서 팔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비판하는 상품까지 팔 수 있습니다. 반기업 영화도 팔리고, 반자본주의 책도 팔리고, 반미 강연도 팔립니다. 시장은 사상의 내용보다 수요를 봅니다. 누군가 그것을 사고 싶어 하면 시장은 공급합니다.
촘스키는 바로 그 시장에서 성공했습니다.
그가 돈을 벌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지식인이 책을 팔고 강연료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누린 시장과 제도를 어떤 언어로 설명했는가입니다. 자본주의를 기괴한 재앙처럼 묘사하면서도, 자신의 반자본주의 지식 상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유통되었습니다.
이것은 촘스키 개인의 사소한 모순이 아닙니다. 현대 좌파 지식인의 한 유형을 보여줍니다. 체제의 혜택을 누리면서 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시장에서 성공하면서 시장을 악으로 묘사하며, 자유 사회에서 발언의 자유를 누리면서 그 자유 사회를 억압 체제처럼 설명하는 유형입니다.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기준
촘스키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그 자신이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식인이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폭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에 봉사하는 지식인을 비판했고,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은 촘스키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권력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펜타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주류 언론의 편향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자신이 누린 제도와 자유에 대해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미국이 단지 경찰국가라면, 왜 촘스키는 미국에서 세계적인 반미 지식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자본주의가 단지 억압의 체제라면, 왜 그의 반자본주의는 시장에서 그렇게 잘 팔렸습니까? 언론과 출판 시장이 단지 세뇌 장치라면, 왜 그의 책과 강연은 그 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었습니까? 지식재산권이 단지 자본의 보호 장치라면, 왜 그의 저작물은 저작권으로 보호되어야 했습니까?
이 질문은 촘스키를 부정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제시한 기준을 그에게도 적용하는 질문입니다.
한국인의 눈에 보이는 촘스키의 공백
한국인의 눈에는 촘스키식 반미 담론에 하나의 큰 공백이 보입니다. 그것은 자유를 가능하게 한 조건에 대한 감각입니다.
한반도에서 자유는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결과였고, 동맹의 결과였고, 군사적 억제력의 결과였고, 국가 생존의 결과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느 날 광장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국가가 살아남아야 했고, 휴전선이 유지되어야 했고,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남하가 막혀야 했습니다.
이 현실을 알고 나면, 미국과 군사력과 반공주의를 단순히 낡은 억압의 언어로만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군사정권의 반공주의는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자유가 억압된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공 자체가 바보들의 헛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군은 실제로 남침했습니다. 중공군은 실제로 개입했습니다. 소련은 실제로 북한 체제를 지원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실제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이 현실을 지워버린 반미 지식은 한국인의 경험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촘스키는 한국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います. 그는 자유 사회의 산물이면서 자유 사회를 억압 체제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힘이 만든 안전지대 안에서 미국의 힘을 악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체제가 제공한 무대 위에서 체제 밖의 예언자처럼 말했습니다.
촘스키라는 브랜드의 의미
촘스키는 자본주의 바깥에 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만들어진 반자본주의 브랜드였습니다. 그는 미국 체제 밖의 반체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 체제가 허용하고, 시장이 확대하고, 대학이 권위를 부여한 반체제 지식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촘스키의 언론 비판이나 미국 외교정책 비판 중에는 검토할 가치가 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은 완전한 선이 아니며, 자본주의도 무결한 제도가 아닙니다. 주류 언론 역시 언제나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비판도 자기 조건을 망각하면 도덕적 수사로 변합니다. 촘스키의 문제는 그가 비판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누린 자유와 제도의 조건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은 채, 그 조건을 가능하게 한 체제를 거의 악으로만 묘사했다는 데 있습니다.
반자본주의도 시장에서 팔립니다. 반체제도 브랜드가 됩니다. 도덕적 분노도 상품이 됩니다.
노암 촘스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한국인의 눈에 그는 단순한 미국 좌파 지식인이 아닙니다. 그는 자유의 하드웨어를 누리면서 그 하드웨어를 악으로 설명한 지식인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촘스키는 매우 특이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촘스키의 이 역설은 그가 비판한 힘이 지탱해 준 안전지대에서 발언했다는 지적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악의 중심이라 비난했던 그 군사력의 직접적인 혜택 위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가 펜타곤을 비판하면서도 펜타곤의 자금으로 연구했던 이중 기준의 모순은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