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는 이상한 존재입니다. 그는 단순한 짐승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말을 하고, 속이고, 어머니의 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어머니인 척합니다. 이것은 실제 호랑이의 행동이라기보다 사람의 행동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호랑이는 실제로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적이었을 수도 있고, 탐관오리였을 수도 있으며, 약한 가족을 빼앗고 남은 아이들까지 삼키려 한 권력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떡을 빼앗고, 어머니를 죽이고, 어머니의 옷을 입고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존재는 자연의 포식자라기보다 인간 사회 안의 약탈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를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호랑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악을 사람의 얼굴로만 말하면, 아이에게 남는 것은 경계심이 아니라 증오일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을 조심하라”는 교훈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미워하라”는 감정으로 바뀌면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인간의 악을 호랑이로 바꾸어 말합니다.
서양의 마녀 이야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보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 《백설공주》의 왕비, 여러 동화 속 계모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악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간 안의 어둠을 직접 보여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신체적 특징을 악의 형상으로 고정할 위험도 있습니다.
실제로 서양 동화 속 마녀의 전형적인 외양인 '매부리코'는 역사적으로 유대인을 악마화하기 위한 반유대주의적 캐리커처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이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이 현실 세계에 덧씌워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는 단지 매부리코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마녀 같다", "교활하고 탐욕스럽다"는 조롱과 사회적 편견에 시달린 무고한 사람들의 역사적 상처가 남았습니다. 가상의 악이 구체적인 인간의 얼굴과 신체를 취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의 타인을 정죄하는 혐오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호랑이는 악을 말하지만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호랑이는 무섭고 잔인하지만, 특정한 인간 집단은 아닙니다. 아이는 호랑이를 경계하면서도 인간 전체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도 비슷합니다. 그 작품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동물들이 탄 구명보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후자의 이야기는 너무 잔혹합니다. 그래서 파이는 그 기억을 동물 이야기로 바꾸어 말합니다.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인간의 잔혹함과 생존 본능을 견딜 수 있는 형상으로 바꾼 존재들입니다.
동물은 진실을 지우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동물은 인간이 진실을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인간이 저지른 악을 인간의 얼굴 그대로 기억하면, 인간은 인간을 미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악을 호랑이로, 하이에나로, 리처드 파커로 바꾸어 말합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호랑이는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괴물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대신 짊어진 동물입니다. 이야기는 아이에게 세상이 안전하다고 속이지 않습니다. 악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고, 어머니의 옷을 입고 문 앞에 설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 자체를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악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인간 혐오로 바꾸지도 않습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호랑이가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였던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의 악을 말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