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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턴 트럼보와 피카소가 바라본 한국전쟁


할리우드 각본가 돌턴 트럼보와 파블로 피카소가 작품을 통해 표현한 한국전쟁의 시선과 그들 세계관의 편향성, 그리고 자유와 역사의 교차점을 다룹니다.

돌턴 트럼보와 피카소가 바라본 한국전쟁

돌턴 트럼보와 파블로 피카소는 서로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였고 정치적 신념을 작품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권력의 폭력을 비판했으며,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감시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두 사람은 흔히 자유와 평화를 옹호한 예술가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다룬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들이 이해한 자유와 평화가 어떤 정치적 세계관 위에 놓여 있었는지도 함께 드러납니다.

할리우드 최고의 각본가, 돌턴 트럼보

돌턴 트럼보는 1905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빵 공장과 여러 허드렛일을 전전하면서 소설과 영화평을 썼고, 1930년대부터 할리우드 각본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사가 빠르고 인물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작가였으며 《키티 포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이후 《로마의 휴일》, 《브레이브 원》, 《스파르타쿠스》, 《엑소더스》, 《빠삐용》 등에 참여했습니다.

트럼보는 단순히 생계를 위해 대본을 쓰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강하게 드러낸 작가였습니다. 그는 1943년 미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소련과 공산주의 운동을 오랫동안 지지했습니다. 《Hollywood Traitors》는 그를 “완고한 당원”이자 스탈린의 소련과 김일성의 북한을 지지한 인물로 평가합니다. 물론 이 책은 강한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쓰였으므로 저자의 평가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제시된 자료와 직접 인용을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트럼보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자를 단순한 범죄자나 외국의 대리인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에 반발했습니다. 1947년 그는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되었으나, 공산당원 여부를 묻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트럼보를 포함한 ‘할리우드 10인’은 이러한 질문이 사상과 결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트럼보는 의회모독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약 11개월간 복역했으며, 이후 영화사들은 그를 고용하지 않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단지 수입이 끊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이름이나 가명으로 각본을 썼으며 《로마의 휴일》과 《브레이브 원》이 오스카상을 받을 때도 시상식에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1960년 커크 더글러스가 《스파르타쿠스》에, 오토 프레밍거가 《엑소더스》에 그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블랙리스트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트럼보의 생애는 사상과 정치적 신념 때문에 작가의 생업과 이름을 박탈한 블랙리스트가 부당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가 자유를 침해당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정치적 판단까지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트럼보가 이해한 한국전쟁

트럼보는 한국전쟁을 미국 정부의 설명과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의 미제작 각본 《An American Story》에서 주인공 캐서린은 북한의 남침을 미국 독립전쟁에 비유합니다.

“This is Korea’s fight for independence, just as we had to fight for our own independence in 1776.”
“이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입니다. 우리도 1776년에 우리 자신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영화사 연구자 버나드 F. 딕의 설명에 따르면, 이 각본에서 북한은 남한이 일으킨 국경분쟁을 끝내기 위해 1950년 6월 ‘독립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묘사되며 미국 정부는 파시즘을 닮아가는 제국주의 국가로 표현됩니다. 트럼보에게 한국전쟁은 한국인이 체제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민족해방투쟁이자 미국 제국주의와 세계 혁명의 충돌이었습니다.

죽은 한국 소년을 애도한 트럼보

트럼보의 시 「Korean Christmas」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한국 소년을 향한 애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윤리와 서구식 문명을 지키기 위해 동양인 아이를 죽여야 했다는 미국 외교명분을 풍자하며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했습니다.

이 시는 폭격으로 죽은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본 그의 인도주의적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깊이 안타까워하면서도,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의 근본 원인이나 북한군의 점령지 학살, 남하한 피난민의 고통은 그의 시선에서 완벽히 배제되었습니다.

피카소는 왜 공산당에 가입했는가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창시한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이었습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게르니카 폭격을 고발한 작품 《게르니카》는 개인의 고통을 보편적 정치 상징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스페인이 프랑크푸르트 독재에 빠지고 파리가 해방된 1944년,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서유럽 공산당은 나치 점령에 맞선 레지스탕스의 중심이었기에 많은 지식인에게 공산주의는 파시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평화 세력으로 비쳤습니다.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은 세계평화대회의 상징이 되었고 그는 평화의 대변자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평화관은 서방의 Military 행동은 침략으로, 공산권의 팽창은 평화 수호로 보는 당시 공산당의 프레임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피카소가 완성한 《한국에서의 학살》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왼쪽에는 무방비의 임산부와 아이들이 절규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얼굴을 잃은 총을 든 기계화된 군인들이 총구르 겨누고 있습니다.

피카소미술관은 이 작품을 민간인을 학살하는 전쟁기계를 고발한 작품이자 노근리 사건 등 미군에 의한 희생을 상징한 명작으로 설명합니다. 피카소는 전쟁의 잔혹성을 예술적 언어로 포착해 냈습니다.

피카소가 본 한국전쟁

피카소는 한국에 가보지 못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의 보도와 전쟁 사진을 통해 한국전쟁을 접했습니다. 그가 그린 화폭에는 서방 군대가 아시아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구도만 잘라내어 표현되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북한군의 남침, 점령지에서의 처형과 납치, 소련과 중국의 개입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피카소가 포착한 것은 한국전쟁의 종합적 역사가 아니라 서방 군사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라는 선택적 한 장면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 비슷한 시선

트럼보는 북한의 침략을 독립전쟁으로 비유했고,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서방 군대의 여성·어린이 처형 장면으로 시각화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미국과 서방 군사행동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진심으로 애도하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정권의 책임과 북한군이 자지러지게 만든 민간인 피해는 그들의 작품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엄격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트럼보가 블랙리스트에 맞서 이름을 되찾을 권리가 있었듯, 피카소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냉전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어 전쟁의 진짜 가해자와 피해의 맥락을 왜곡한 그들의 작품은, 정작 그 전쟁을 온몸으로 견뎌낸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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