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animality를 지워버린 규범주의
"김누리" 교수는 68혁명의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성해방을 제시하며, 성적 억압이 인간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힘을 가로막기에 성을 자유롭게 표출해야만 권위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성에 대한 과도한 금기와 이중잣대를 비판하고 피임, 성교육,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확대한 것은 분명히 필요한 진전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실제 인간을 생물학적이고 동물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교육을 통해 새로 개조해야 할 규범적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더 근본적인 맹점이 존재합니다. 마이클 룬드블라드의 "**animality**"라는 관점을 빌린다면, 인간은 동물과 완전히 격리된 순수한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몸과 욕망, 번식과 애착이라는 불가피한 동물적 조건 위에 문화를 세워 나가는 존재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규범을 주로 억압과 해방이라는 납작한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하는 김누리 교수의 생각과 달리, 인간은 추상적 자유의 주체이기 이전에 임신과 출산을 겪고 오랜 시간 자녀를 책임져야 하는 생물학적 존재이며, 그 안에는 성욕뿐 아니라 강한 애착, 질투, 배우자 상실에 대한 공포, 자녀 보호 본능 같은 복합적인 animality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동물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성규범을 억압으로 치부해버리면, 실제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은 소외되고 오직 이론가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가공의 규범적 주체만 남게 될 뿐입니다.
김누리 교수의 인간은 실제 인간이 아닙니다
김누리 교수가 지향하는 성숙한 인간상이란 권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고 전통적 가족제도나 성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으며, 불필요한 성적 금기를 내면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인간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를 모든 인간이 도달해야 할 보편적 잣대로 규정하여 그 잣대와 다른 모든 행동을 미성숙이나 억압의 결과로 낙인찍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이 프레임 속에서 성적 질투는 단지 해방되지 못한 소유욕으로 격하되고, 정절은 가부장적 통제의 흔적이 되며, 가족은 재산 상속과 여성 억압을 공고히 하는 낡은 장치로 치부되는 한편, 성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모조리 자율성을 잃어버린 자기검열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실제 인간에게 있어 질투와 애착, 배우자에 대한 독점성과 가족적 유대감은 단순히 외부에서 주입한 관념이 아니라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양육 투자를 확보하기 위해 진화의 역사 속에서 정교하게 발달해 온 필수적인 정서입니다. 결국 문화라는 것은 인간의 이러한 근원적이고 동물적인 성향을 억지로 도려내는 대신, 그것이 파괴적인 폭력으로 번지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형태로 승화시키면서 발전해 온 집단적 해법인 셈입니다.
인간의 성은 무제한적 성행위를 위해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단기적 성관계의 기회주의적 전략과 장기적 짝결합의 협력적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에 인간의 짝짓기 체계를 단일한 모델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경우조차 실질적으로는 한 시점에 한 명의 배우자와 결합하는 방식이 가장 널리 관찰되었습니다. 또한 혼외 성관계가 존재하더라도 실제 유전자 분석 상 인간의 혼외 친자율은 다른 일부일처제 동물과 비교했을 때 매우 낮은 편에 머문다는 연구 결과들은 인류가 짝결합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함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자녀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한 미성숙 기간이 유독 길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서 그 엄청난 양육비용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이에 따라 아버지의 지속적인 헌신과 친족의 협력이 진화 역사상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적응 과정에서 강한 "**짝결합**"이 남성의 부성투자를 안정적으로 이끌어내어 초기 인류가 살아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인간의 지속적인 성관계 역시 배란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속됨으로써 배우자 간의 정서적 결속력을 높이고 공동 양육의 안정성을 보조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사랑과 짝결합은 인간만이 뇌로 창조해 낸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다른 짝결합 동물들과 유전적으로 공유하는 심오한 신경생물학적 토대를 지닌 실제 본성이며, 따라서 성해방이 곧 억압 없는 본성의 회복이라는 단선적 주장은 생물학적 근거가 매우 취약하고, 무제한적인 성적 개방 또한 인간의 복합적인 본성 중 성적 욕망만을 선택적으로 비대화시킨 규범적 모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성규범은 단순한 억압이 아니었습니다
피임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사회에서 모든 성관계는 본질적으로 언제든 임신과 출산이라는 신체적 위험으로 이어졌으며, 이 고통과 비용의 부담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주거, 보호, 교육 등 막대한 자원이 요구되었기에, 사회는 성관계라는 사적 행위와 양육의 의무를 강제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혼인, 정절, 부양의무 및 상속제도 같은 장치들을 발달시켰습니다. 이러한 규범들이 과거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에게 불공정하고 가혹한 억압으로 작동했던 어두운 측면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제도의 기능을 단순히 억압 하나로만 단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성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임신과 양육이라는 중대한 공동체적 비용을 특정 관계 안에 묶어두어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려는 현실적인 지혜였습니다. 따라서 "**성해방**"은 단순히 낡은 금지와 억압을 허물어버리는 감정적 선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존 규범이 불완전하게나마 담당하고 있던 아동 보호와 책임 분배의 구조를 향후 어떤 새로운 제도와 복지로 대체할 것인지에 대한 복합적 대안을 함께 마련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정교한 사회적 실험인 것입니다.
독일과 한국은 같은 조건에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과 한국의 과거 성문화가 달랐던 이유를 두고 단순히 독일인은 성숙했고 한국인은 억압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구학적 조건을 배제한 일방적 판정입니다. 서유럽은 근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출산율이 완만히 하락해 1950년대 독일의 합계출산율은 이미 약 2명 대에 도달해 있었던 반면, 한국은 전쟁 복구기인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한 명당 평균 6명에 달하는 다산 사회를 완강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이 1960년대 성혁명의 거센 물결을 맞이했을 때는 이미 출산의 무거운 부담에서 상당 부분 벗어난 상태였지만, 한국은 태어난 아이들의 생존과 돌봄을 오로지 개별 가족의 유대와 헌신에만 기댄 채 생존해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성이 평균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던 다산 사회에서 성은 결코 사적인 취향으로 처리될 수 없었고, 한 번의 육체적 관계가 가족의 생계와 아이의 생사에 직결되었기에 이에 적응한 성적 신중함과 가족 규범은 억압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현실적 발버둥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 차이를 도외시한 채 독일의 성문화를 성숙함의 표준으로 규정하고 한국을 미성숙으로 판정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얄팍한 몰이해에 불과합니다.
현대적 성평등은 매우 새로운 조건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성평등과 성적 자유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결코 흔한 상태가 아니었으며, 여성의 경제 활동 확대, 가사 기술의 비약적 발달, 법적 권리의 보장, 그리고 특히 성관계와 임신의 연결 고리를 끊어낸 대중적인 피임 기술의 보급 위에서 비로소 기능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체제입니다. 가족계획과 안전한 피임은 여성이 스스로 임신 여부와 생애 주기를 결정하도록 하여 교육 수준의 비약적 향상과 활발한 사회 진출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여성의 건강권과 생계 능력을 확보하여 성평등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피임 기술 이전에는 임신의 엄청난 신체적·경제적 위험이 성관계의 자유와 언제나 겹쳐 있었으나, 기술 발달이 이 오래된 생물학적 족쇄를 느슨하게 완화해 준 덕분에 비로소 자유로운 성적 자기결정권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의 성평등과 성윤리는 단순한 인류 의식의 순수한 진보로 쟁취한 결과물이 아니라 고도화된 문명의 기술이 제약을 우회시켜 준 결과이기에, 이러한 물질적·기술적 차이를 무시한 채 과거의 엄격함을 단순히 억압이나 미성숙으로 낙인찍는 태도는 불공정한 심판에 불과합니다.
성평등과 성개방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남녀가 사회적, 법적, 경제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생애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성평등의 가치와 성적 행동의 모든 사회적 규제를 허물자는 성개방은 서로 보완적일 수는 있어도 결코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다른 영역입니다. 성평등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투쟁하는 한편으로도 책임 없는 무제한적 성개방이 빚어내는 파편화와 약자 착취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론적으로 매우 탄탄하고 정당합니다. 실제로 성적으로 극도로 개방된 집단이나 성 해방 공동체 내부에서조차 지배 세력이나 영향력 있는 남성의 성적 욕망이 '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되고, 여성에 대한 교묘한 강요와 정서적 착취가 성해방의 구호 뒤에 숨어 은폐되었던 사례들은 수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즉 성개방의 최초 기원이 억압을 허물려는 선한 의도였다고 해서 그 현실적 결과가 반드시 평등하고 안전한 관계를 담보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성문화를 평가할 때 아름다운 선언이 아니라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장 여부, 성폭력과 정서적 가스라이팅의 실질적 감소, 임신과 공동 양육 책임의 공정한 분배, 그리고 자유의 대가로 빚어지는 부작용을 취약한 자녀에게 넘기지는 않았는지와 같은 실제의 결과로 냉철하게 검증해야 마땅합니다.
성해방은 아직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실험입니다
피임의 보급과 여성의 사회적 독립이 전례 없는 성적 자유를 안겨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급진적 변화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과 결합하여 어떤 안정적인 문화적 균형을 이룰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거대한 실험에 가깝습니다. 기록적인 출산율 하락, 결속력의 약화와 잦은 이혼으로 인한 가족의 붕괴, 한부모 양육 가정의 경제적 빈곤화, 극단적 개인주의가 낳은 고독사와 사회적 고립, 그리고 디지털 공간에서의 변종 성착취 범람 등은 성의 전면적 해방이 초래한 짙은 어두운 그늘입니다. 물론 이 다면적인 문명적 위기를 단순히 성개방 탓으로만 일축할 수는 없으며 청년층의 고용 불안과 주거비 폭등 등 다양한 사회 구조적 요인이 함께 작동한 결과이지만, 그렇다고 현 성개방 트렌드를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미 완성된 해방으로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제도와 문화는 당대의 쾌락적 만족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자녀들이 얼마나 안정적인 보호 속에서 건강한 유대를 형성하며 자라나는가라는 장기적인 공동체적 책임을 반드시 추적해야 합니다. 이 결과주의적 평가 위에서 성적 자유가 확대된 이후 관계의 신뢰성과 아이에 대한 돌봄 의무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자유가 주는 이득과 해체의 비용이 계층과 성별에 따라 얼마나 불공정하게 전가되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되물어야 합니다.
DNA 검사는 새로운 성윤리의 조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전통적 성윤리가 여성의 정절과 성적 독점성에 대해 그토록 가혹하고 집요한 규제를 부과했던 배경에는 인간의 한계로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친자의 불확실성이라는 생물학적 비대칭성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출산 경험을 통해 자녀와의 생물학적 관계를 의심 없이 인지할 수 있지만 아버지는 파트너의 도덕적 신뢰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기에, 부계 사회는 상속 질서와 자원 배분의 안전을 꾀하고자 여성의 성행동을 극단적으로 통제하는 억압적 관습들을 파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초정밀 DNA 분석 기술의 보급은 수천 년간 인류를 구속했던 생물학적 전제를 원천적으로 허물어 친자 불확실성을 기술적으로 소멸시키는 동시에, 상대의 동의 없는 유전자 검사의 타당성 여부, 형성된 가족적 신뢰보다 유전자 일치가 언제나 우선해야 하는가의 가치 대립, 그리고 생물학적 혈연이 부정되었을 때의 법적 양육비 부양 책임 문제 등 새로운 윤리적 갈등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전자 기술이 성적 행동을 더욱 가볍게 개방하도록 부추길지, 아니면 도리어 정직과 사전 합의의 책임을 더욱 투명하게 요구하는 엄격한 계약 중심의 윤리를 강제할지는 예단할 수 없으나, 기술 변화가 위험 구조를 바꾸고 이에 따라 미래의 성윤리 역시 방임이 아닌 자유로운 관계 선택권과 친자 확인에 따르는 양육 의무 및 배신에 대한 책임을 전례 없이 촘촘하게 묻는 책임 윤리로 수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김누리 교수는 인간을 이해하기보다 교정하려 합니다
김누리 교수가 지닌 비평의 가장 치명적인 한계는 단순히 성개방을 적극 지지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 본성의 민낯을 정직하게 응시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선험적으로 설계해 둔 '바람직한 계몽 모델'을 세상에 강요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이념 속에서 해방된 시민은 질투와 독점욕 같은 전근대적 소유욕을 단번에 청산해야 하고, 성숙한 주체는 성적 금기나 낡은 가족 제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며, 민주적인 인간은 성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향유할 수 있어야만 하고, 만약 이 형틀에 맞지 않는 대다수 한국인이 있다면 그들은 권위주의에 깊이 오염되었거나 미성숙한 계몽 대상으로 가차 없이 격하되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념이 하라는 대로 백지 위에 새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오랜 진화의 역사와 생물학적 애착, 그리고 자녀 돌봄의 필요성을 몸에 새겨 지닌 엄연한 생물학적 동물입니다. 물론 질투와 소유욕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온당하다거나 가부장적 가정이 정의롭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animality를 청산해야 할 억압의 잔재나 오류로만 규정하는 한 실제 인간을 보호하고 다독일 수 있는 현실적인 윤리 제도를 고안해 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문학과 문화는 인간의 동물성을 통째로 지워내기 위한 위생 도구가 아니라, 그 동물성이 폭력으로 번져 파멸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감싸고 조절하면서도 인류가 유대와 생식을 이어가도록 설계해 온 집단적 경험의 정수입니다.
인간해방론이 인간을 지워버릴 때
성해방과 개방이 이뤄낸 여성의 권리 신장이나 성적 지식의 양지화 같은 긍정적 유산은 뚜렷하지만, 해방이라는 이름의 선함이 제도가 낳은 현실의 상처와 해체의 부작용에 면죄부를 주는 도덕적 면허로 작동해서는 안 됩니다. 성적 자유의 대가로 신뢰와 양육의 책임 구조가 해체되어 버렸다면 우리는 그것 또한 엄연한 문명의 비용으로 냉철하게 산출해야 하며, 만약 자유를 누리는 혜택은 강자들이 가져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방임과 깨어진 가정의 독박 양육비 같은 파괴적 비용은 사회적 약자와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면 이 제도적 흐름은 반드시 수정되고 정비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성은 결코 일회성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가벼운 유희가 아니며 번식과 짝결합, 집요한 애착과 공동 양육, 자유와 책임이 복잡하게 얽힌 무겁고 실존적인 인간 조건입니다. 김누리 교수는 인간을 생물학적 동물로 직시하고 이해하기보다 규범주의적 교육을 통해 새로 써넣으려 하지만, 구체적 현실을 보지 않는 인간해방론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지워버리는 교정 장치로 전락할 뿐입니다.
인간의 animality를 단지 극복해야 할 억압의 흔적으로만 몰아세우는 인간해방론은 인간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인본주의 철학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애착과 고통을 배제한 채 본성을 뜯어고치려 덤비는 또 다른 오만하고 차가운 규범주의일 뿐입니다.
성해방을 선언하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기는 아주 쉽지만 자유가 남기고 간 관계의 상처를 치유하고 양육 의무를 엄격히 규율하며 새로운 윤리적 조화를 세우는 현실의 작업은 매우 고단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성윤리는 모든 사회적 금기와 예의를 해체하자는 방임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한계와 동물성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자유의 기쁨과 책임의 무게 사이에서 가장 조화로운 균형점을 부단히 모색해 나가는 윤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