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은 제네바 협정을 지키는 쪽이 어떻게 곤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유엔군은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우해야 했고, 포로를 강제로 송환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공산 측은 바로 그 원칙을 역이용했습니다. 포로를 조직하고, 폭동을 일으키고, 희생자를 만들고, 그 희생을 국제 여론전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북한과 중공에 붙잡힌 유엔군 포로들은 제네바 협정의 보호를 받았을까요. 그들은 자기 의사를 밝힐 수 있었을까요.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보다 더 어둡습니다. 거제도에서는 적어도 공산 포로들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 중공의 손에 들어간 일부 유엔군 포로들은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군포로의 경우, 그 비극은 훨씬 더 길고 참혹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북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려나 값싼 노동력처럼 취급되었습니다.
포로 교환은 모든 것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포로 문제는 그때 정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통일부는 정전 당시 국군 실종자가 약 8만 2천 명으로 추정되지만, 포로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994년 조창호 소위의 탈북 귀환 이후 남한으로 돌아온 귀환 국군포로는 총 80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역시 1953년 4월부터 1954년 1월까지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지만, 유엔군사령부가 집계한 국군 실종자 약 8만 2천 명에 비해 공산군 측이 최종 인도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고 정리합니다. 유엔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북한은 “강제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한 명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미해결 상태로 남았습니다.
이 숫자만 보아도 포로 교환은 전쟁의 상처를 봉합하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이름도, 죽음도, 생존 여부도 제대로 확인되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을 뒤흔든 900명 미귀환 보고
미군 포로 문제도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알려진 숫자는 공산권에 남겠다고 한 미군 21명입니다. 그러나 이 숫자만 보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21명은 자발적 잔류자의 숫자입니다. 그것과 별개로, 한때 공산군 수중에 있었던 정황이 있음에도 송환되지 않고 행방이 설명되지 않은 미군 포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1953년 12월 22일, 정전이 성립된 지 불과 몇 달 뒤 작성된 미 국방부 메모는 이 문제를 드러냅니다. 보도에 따르면 로버트 T. 스티븐스 육군장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육군 610명, 공군 300명 이상이 포로 명단에 있었지만 “수용소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취지로 보고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 사실을 휴전 협상 당시 충분히 알았더라면 포로 송환을 회담의 선결 조건으로 요구했을 수도 있었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900명대 숫자는 “공산주의를 선택한 포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들은 송환되었어야 하거나 최소한 행방이 설명되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공산 측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향의 문제가 아니라 미송환·미확인 포로 문제였습니다.
이 대목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과 정반대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거제도에서는 공산 포로들이 자유 송환을 거부하며 자신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 중공 수중에 있던 일부 유엔군 포로들은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겪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는 이미 사망했을 것입니다. 일부는 강제 행군 중 죽었을 수 있습니다. 일부는 수용소에서 굶주림, 혹한, 질병, 학대 속에 죽었을 수 있습니다. 또 일부는 사망했지만 그 사실이 제대로 통보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의 포로수용소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포로들은 굶주림과 추위, 질병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이른바 ‘타이거 그룹’은 그 참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국 DPAA 자료는 ‘타이거’라고 불린 북한군 장교가 통솔한 포로 행렬과 관련하여, 700명 이상의 미국 포로 가운데 정전 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262명뿐이었고, 생존자 조니 존슨이 포로생활 중 사망한 496명의 이름을 몰래 기록했다고 설명합니다.
더 민감한 문제도 있습니다. 일부 미군 포로, 특히 조종사나 항공기술 관련 인원이 소련으로 이송되었을 가능성입니다. 이 문제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의혹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RAND의 폴 콜 보고서는 한국전쟁 POW/MIA 문제를 다루며, 일부 미국 포로가 한국전쟁 전투지역에서 소련 영토로 이송되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보았고, 잠정적으로 약 50명의 미국 POW/MIA가 소련 영토로 이송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도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직접적인 1차 증거는 없다고 하면서도, 한국전쟁 포로가 소련으로 이송되었을 가능성에 관한 누적 정황이 존재한다고 정리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포로는 단지 전쟁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정보의 대상이 됩니다. 제트기 조종사, 항공기술자, 무기체계와 작전 절차를 아는 포로는 인간이 아니라 군사정보 자원으로 취급됩니다. 병법의 세계에서는 포로도 인간이 아니라 쓸모에 따라 분류되는 자원이 됩니다.
국군포로는 더 깊은 침묵 속에 버려졌습니다
미군 포로 문제도 심각하지만, 국군포로 문제는 훨씬 더 아픕니다. 미군·영국군 등 외국군 포로는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협상 카드였습니다. 학대받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정 부분 포로 교환의 틀 안에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군포로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군인이었지만, 북한은 그들을 외국군 포로처럼 다루지 않았습니다. ‘남조선 괴뢰군’ 출신으로 보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북한 내부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다수는 탄광, 광산, 벌목, 건설 현장 같은 가장 힘든 노동 현장에 배치되었다고 증언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도 아니고 시민도 아닌 존재로 밀려났습니다. 북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성분, 가장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억류가 아닙니다. 포로의 신분을 지우고, 그 사람을 체제의 노동력으로 흡수한 것입니다. 거제도에서 포로가 선전과 폭동의 도구가 되었다면, 북한에 남겨진 국군포로는 탄광과 오지의 노동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제네바 협정을 악용한 병법이고, 다른 하나는 제네바 협정을 무시한 병법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같습니다. 인간은 사라지고 체제의 필요만 남았습니다.
김영삼 정부: 조창호 소위의 귀환과 문제의 재발견
국군포로 문제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도 잊혀져 있었습니다. 북한이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남한에서도 전쟁의 기억이 멀어지면서 이 문제는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다 1994년 10월 조창호 소위가 40여 년 만에 북한을 탈출해 귀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조창호 소위의 귀환을 계기로 6·25전쟁 포로·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졌고, 정부가 국군포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군포로·실종자업무 처리규정」을 마련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국방부는 1994년 11월 「국군포로 및 실종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97년 9월까지 흩어져 있던 자료를 전산처리해 실종자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반공적 성격이 강한 정부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국군포로 문제를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조창호 소위의 귀환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한국 사회에 “아직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각인시켰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조치는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국군포로 문제를 다시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법은 만들었지만 송환은 없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화해와 대화를 중시했습니다. 햇볕정책은 적대와 단절보다 교류와 지원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군포로 문제에서 보자면, 이 정책은 중요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999년 1월 29일 「국군포로대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법이 생존 국군포로 파악과 송환대책, 귀환 시 보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해에는 국군포로 지원을 위한 세부 기준과 절차를 담은 지원지침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을 만든 것과 사람을 데려온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 대화하고 지원하고 협력하려 했지만, 국군포로 송환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도주의적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북한은 계속 “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남북 화해의 분위기는 있었지만, 탄광과 오지에서 늙어가던 국군포로의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는 제도는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큰 틀 속에서 국군포로 문제를 중심 의제로 밀어붙이지 못했습니다. 지원는 있었지만 송환은 없었습니다. 화해의 언어는 있었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법은 확대되었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역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논의를 중시했습니다. 이 시기에도 제도적 보완은 이루어졌습니다. 2006년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2007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법이 기존 「국군포로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대체한 법률이며, 국군포로의 송환과 정착지원을 위한 법적 틀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법의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국군포로 문제를 단순한 보상 문제가 아니라 송환, 실태 파악, 가족 지원 문제로 다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본질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국군포로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남북관계의 최우선 의제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도 김대중 정부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의 분위기를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국군포로 문제는 분위기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조용한 대화와 제도적 보완만으로는 사람을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법은 확대되었지만, 포로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절차는 있었지만 압박은 약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국군포로 문제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보도에 따르면 국군포로대책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 각각 두 차례 열렸고, 2021년 11월 이후 2년 1개 월 만에 2023년에 다시 개최되었습니다. 2023년 아시아경제 보도도 문재인 정부 시기 국군포로대책위가 열렸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역시 실질적 송환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군사합의, 대화 분위기, 평화 담론은 있었지만, 국군포로 문제는 전면에 서지 못했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군포로 문제도 남북관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다루어진 측면이 큽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정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북한과의 대화, 지원, 협력은 강조되었지만, 그 대가로 국군포로 송환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여러 차례 제도를 만들고 절차를 유지했지만, 북한에 남겨진 사람들을 데려오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대북 포용정책의 도덕적 공백
대북 포용정책은 평화를 말했습니다. 전쟁을 막고, 긴장을 낮추고, 교류를 확대하자는 목표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말하려면 먼저 전쟁이 남긴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가 있다면, 그들은 남북관계의 장애물이 아니라 남북관계가 진정으로 인간적인가를 묻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서 한국의 대북정책은 너무 오랫동안 실패했습니다. 북한에 식량을 보내고, 협력 사업을 추진하고, 정상회담을 열고, 평화의 언어를 말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군포로 문제는 중심 의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법은 만들었지만 송환은 없었습니다. 지원은 있었지만 귀환은 없었습니다. 남북 화해는 말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북한의 탄광과 오지에서 늙어간 포로들의 이름은 충분히 불리지 못했습니다.
국군포로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단순한 정쟁거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국가가 자기 군인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국가의 명령을 받고 싸운 사람이 포로가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그를 끝까지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의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거제도와 북한 수용소는 서로를 비춥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은 제네바 협정을 지키는 쪽이 어떻게 곤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유엔군은 포로를 인간으로 대우하려 했고, 강제송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공산 측은 그 규범을 병법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반대로 북한과 중공의 유엔군·국군포로 문제는 제네바 협정을 지키지 않는 쪽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굶주림, 혹한, 죽음의 행군, 정치교육, 미송환, 불투명한 사망 기록, 소련 이송 의혹, 국군포로의 강제노동 문제가 이어집니다.
두 사건은 서로 반대편에 있지만 같은 결론으로 갑니다. 규범을 악용하는 정치도 인간을 파괴하고, 규범을 무시하는 정치도 인간을 파괴합니다. 병법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제도에서 포로는 폭동과 선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수용소에서 포로는 심문과 노동과 은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국군포로는 특히 더 오래 버려졌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귀환하지 못했고, 북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포로수용소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거대한 수용소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포로가 사라지는 나라
문명국가라면 포로를 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포로는 전투에서 제외된 인간입니다. 그는 보호되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하며, 송환되어야 합니다. 죽었다면 죽음이 확인되어야 하고, 유해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제네바 협정의 최소한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병법의 나라는 포로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포로는 협상 카드가 되고, 선전 도구가 되고, 심문 대상이 되고, 노동력이 됩니다. 죽으면 숫자에서 지워지고, 살아 있으면 체제의 필요에 따라 감춰집니다. 인간의 이름은 사라지고, 체제의 목적만 남습니다.
미귀환 미국 포로 900명대 문제와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 문제는 모두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포로는 인간인가, 아니면 체제의 자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한 문명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제네바 협정은 종이 위의 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적이라도 인간으로 보겠다는 문명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정치, 인간을 숨기고 지우고 동원하는 병법의 세계에서는 그 약속이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래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과 북한의 미귀환 포로 문제는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는 규범을 악용한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을 무시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도구로 삼는 정치에는 인본주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포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도, 자유도, 민주주의도 결국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