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화
현대 자유주의는 피해자 역할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제 피해자는 존재합니다. 차별을 받은 사람도 있고, 폭력과 가난과 제도적 불이익을 겪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피해자라는 말이 정치의 중심 언어가 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유주의는 선거와 사회운동에서 피해자 정체성을 강력한 도덕적 자원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집단이 자신을 피해자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치학자 아론 와일다브스키는 이런 상황을 풍자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집단을 모두 더하면 인구의 100%를 훨씬 넘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는 이 수치를 “374%”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실제 인구 통계라기보다, 피해자 지위가 너무 넓게 확장되었다는 풍자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좌파의 정치 언어에는 피해자 집단이 계속 늘어납니다. 인종적 소수자,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 미혼모, 가난한 사람, 실업자, 예술가, 학자, 환경운동가, 동물권 운동가가 모두 피해자 언어 안에 들어옵니다. 이들 중에는 실제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집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요구가 피해자 지위로 포장될 때, 피해자라는 말은 점점 도덕적 무기가 됩니다.
문제는 피해자 지위가 정치적 특권으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피해자로 인정받는 순간, 그 주장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도덕적 명령처럼 취급됩니다. 반대자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으로 몰립니다. 토론은 쉬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케네스 미노그는 《The Liberal Mind》에서 현대 자유주의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집착한다는 보았습니다. 자유주의는 사회를 고통받는 사람과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의 구도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구도에서는 정치가 현실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극이 됩니다. 한쪽에는 피해자가 있고, 다른 쪽에는 가해자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월호 참사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발생했고, 30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많은 희생자가 학생이었기 때문에 국민적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이 참사는 안전 규제, 구조 실패, 국가 책임이라는 문제를 남겼습니다. 당연히 기억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러나 세월호는 단순한 참사 기억을 넘어 정치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노란 리본은 애도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항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월호를 어떻게 말하느냐가 곧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호는 특정 정치 진영의 도덕적 자산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비교되는 사건이 무안공항 제주항공 2216편 사고입니다. 이 사고는 2024년 12월 29일 발생했습니다. 방콕에서 무안으로 오던 여객기가 착륙 과정에서 활주로를 이탈했고, 구조물과 충돌하면서 대형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탑승자 181명 중 179명이 사망했습니다. 한국 항공사고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무안공항 사고의 사회적 기억은 세월호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의 수가 적어서가 아닙니다. 슬픔이 작아서도 아닙니다. 사고가 덜 비극적이어서도 아닙니다. 차이는 정치적 활용 가능성에 있습니다.
세월호는 특정 정권을 공격하는 강력한 정치적 상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국가가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미지는 매우 강했습니다. 그것은 분노, 애도, 반정부 정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반면 무안공항 사고는 그런 방식으로 사용되기 어려웠습니다. 사고 원인은 조류 충돌, 착륙 과정, 활주로 주변 구조물, 공항 안전 기준, 항공사와 정부의 관리 책임 등 복합적이었습니다. 분노의 방향을 하나의 정치적 상징으로 고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한 문제를 보여줍니다. 어떤 참사는 오래 기억되고, 어떤 참사는 빨리 잊힙니다. 그 기준은 반드시 희생의 규모나 고통의 깊이가 아닙니다. 정치적 서사로 만들 수 있는가가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피해자가 진영의 도덕적 자산이 될 수 있으면 기억은 오래 유지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모는 빠르게 사라지고, 사건은 기술적 조사와 행정 절차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무안공항 희생자의 고통을 세월호와 비교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피해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피해는 동등하게 애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화된 피해는 더 크게 기억되고, 정치화되기 어려운 피해는 더 빨리 잊힙니다.
피해자 정치는 자유주의에 유리한 구조를 만듭니다. 피해자가 많을수록 더 많은 개입이 필요해집니다. 더 많은 규제, 더 많은 예산,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전문가, 더 많은 행정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엘리트는 피해자의 대변자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그 대변자의 지위를 통해 사회를 다시 설계하려 합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자들이 피해자 정치에 의심을 품는 이유입니다. 보수주의자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정치적 권리나 국가 개입의 근거로 바꾸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보수주의는 개인의 책임, 가족, 공동체, 규범, 자조의 힘을 중시합니다. 피해자 정치는 이런 요소들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피해자를 돕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피해자 정체성을 영구적인 정치 자산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말과 사람을 계속 피해자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은 다릅니다. 진짜 도움은 피해자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시 책임과 자율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현대 자유주의의 문제는 고통에 관심을 가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고통을 정치의 중심 자산으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 도덕적 우월성을 얻고, 반대자를 가해자로 몰아붙이는 정치는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피해자 정체성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민은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상처 입은 집단의 구성원으로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정치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토론이 아니라, 누가 더 큰 피해자인지를 겨루는 경쟁이 됩니다. 이것이 피해자 정치의 가장 큰 위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