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솝 우화로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왕을 원한 개구리들」이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The Frogs Who Desired a King이라고 불리고, 페리 색인에서는 44번으로 분류됩니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정치적 우화로 읽혀 왔습니다.
개구리들은 연못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느슨했고, 아무도 자신들을 다스리지 않는 상태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개구리들은 제우스에게 왕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제우스는 처음에 통나무 하나를 연못에 던져주었습니다. 통나무가 물에 떨어지자 개구리들은 깜짝 놀라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통나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나무 왕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명령하지도 않았고, 벌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개구리들은 곧 통나무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왕을 이제는 우습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구리들은 다시 제우스에게 요구했습니다.
“이런 왕 말고 진짜 왕을 보내주십시오.”
그러자 제우스는 황새를 보냈습니다. 황새는 통나무와 달랐습니다. 그는 움직였습니다. 그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연못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구리들을 하나씩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우화는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
이 이야기는 이상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면 “왕을 달라고 조르더니 벌을 받았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이것이 단지 왕정에 대한 옹호인지, 대중에 대한 조롱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살던 백성이 괜히 불평하다가 망했다는 이야기인지 헷갈립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핵심은 “왕을 요구하면 안 된다”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우화는 "권력을 요구하는 사람의 착각"을 말합니다.
개구리들이 정말 원한 것은 왕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질서였습니다. 안정이었습니다. 누군가 위에서 연못을 정리해주고, 자신들의 불안을 없애주고, 살아가는 세계에 확실한 형식을 부여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도 불안하면 질서를 원합니다. 혼란이 길어지면 강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범죄가 늘어나면 강한 처벌을 원합니다.
문제는 개구리들이 권력의 성격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왕이 있으면 자신들이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닙니다. 왕은 권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권력은 누군가를 보호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억압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권력은 언제나 자신을 불러온 사람에게도 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우화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요구할 때, 그 권력이 자신을 위해서만 쓰일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통나무 왕과 황새 왕
통나무 왕은 무능한 권력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구리들은 그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통나무 왕은 적어도 개구리들을 잡아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무능했지만 무해했습니다.
황새 왕은 다릅니다. 그는 유능합니다. 움직입니다. 판단합니다. 행동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힘 때문에 위험합니다. 황새는 개구리들이 기대한 질서의 상징이 아니라, 포식자의 권력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약한 권력이 좋고 강한 권력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능한 권력도 문제입니다. 통나무 왕은 연못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한 권력은 더 큰 질문을 요구합니다. 그 권력은 누가 통제할 것인가. 그 권력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그 권력이 나를 향할 때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개구리들은 이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진짜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것은 제도적으로 제한된 권력이 아니라, 그냥 힘이 센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힘이 센 존재가 연못에 들어온 순간, 개구리들은 더 이상 자유로운 주민이 아니라 먹이가 되었습니다.
황새를 통나무로 착각한 사람들
이 우화와 가장 닮은 현대사의 사례는 바이마르 말기의 독일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 위기, 정치 폭력, 정당 분열, 대중적 불안 속에서 흔들렸습니다. 사람들은 질서를 원했습니다. 강한 국가를 원했습니다. 혼란을 끝낼 힘을 원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바로 그 불안을 이용했습니다.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격렬히 공격하며 강력한 국가를 약속했고,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합법적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대중만이 아닙니다. 독일의 보수 엘리트들도 히틀러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위험한 선동가로 보면서도, 그를 권력 안으로 끌어들여 좌파를 제압하고 대중정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보수 엘리트층은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하되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둘 수 있다고 믿고 그를 내각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나치만으로 구성된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보수 정치인들과 비당파 관료들이 함께 있었고, 힌덴부르크의 참모들은 보수파가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해 헌법을 바꾸고 권위주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황새를 불러오면서도, 자신들은 그 황새를 통나무처럼 다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권력은 일단 들어오면 자기 생리를 따릅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통제 가능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권력에 들어간 뒤 곧바로 그 권력의 규칙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 3월 23일, 의회와 대통령의 승인 없이도 내각에 입법권을 부여하고 헌법에 위배되는 조치까지 가능하게 만든 수권법(Enabling Act)이 통과되었습니다. 히틀러 독재 체제의 법적 초석이 놓인 것입니다.
이 순간 보수 엘리트들의 계산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이용해 질서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이 지키려던 질서까지 삼켰습니다. 그들은 강한 권력을 불러왔지만, 그 권력이 자신들의 손 안에 머물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것이 개구리 우화의 현실판입니다. 개구리들은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이 어떤 존재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보수 엘리트들은 강한 지도자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권력에 들어온 뒤 어떤 권한을 갖게 될지, 그 권한을 누가 제한할 수 있을지 충분히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강한 권력을 도구로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은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특히 제도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자기 생리를 가집니다. 권력은 더 많은 권한을 원하고, 더 적은 견제를 원하며, 자신을 제한하는 사람을 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황새는 개구리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황새는 황새의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이란혁명: 독재를 몰아낸 힘이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이란혁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란 혁명은 처음부터 이슬람 신정 체제라는 하나의 목표로 뭉친 단일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친미 왕정인 샤(Shah)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동의 전선 아래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좌파, 이슬람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느슨하게 손을 잡은 연합체에 가까웠습니다.
자유주의 입헌파, 세속적 국민전선, 사회주의 좌파, 그리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파까지 모두 동참했으나, 주도권은 조직력과 대중 선동에서 앞선 이슬람 강경파에게로 급격히 쏠렸습니다. 그리고 혁명이라는 폭풍이 지나간 뒤, 한때 연대했던 다른 세력들은 무참히 배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독재를 무너뜨리는 힘과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권력이 기존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 유용하다고 해서, 그 권력이 혁명 이후 자유로운 질서를 만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샤를 몰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강한 혁명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혁명 권력이 승리한 뒤, 그 권력은 모든 혁명 세력을 동등하게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세력을 차례로 밀어냈습니다. 1979년 8월, 호메이니는 새 신정 헌법의 권력 집중적 조항들을 비판하던 자유주의, 민족주의, 세속 좌파 성향의 언론매체 21개를 일시에 강제 폐간시켰습니다.
여기서도 개구리 우화의 구조가 반복됩니다. 사람들은 강한 힘을 불러옵니다. 처음에는 그 힘이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 제도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그것은 해방의 도구에서 지배의 도구로 바뀝니다. 그리고 결국 그 힘을 불러온 사람들까지 침묵하게 만듭니다.
강한 권력은 항상 내 편이 아닙니다
개구리들은 황새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이마르의 보수 엘리트들은 히틀러를 자기들이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란혁명의 여러 반대 세력은 샤를 무너뜨리는 힘이 혁명 이후에도 자신들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강한 권력은 항상 내 편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강한 권력은 처음에는 내 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공격할 때는 정의처럼 보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혼란을 잠재울 때는 질서처럼 보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체제를 무너뜨릴 때는 해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권력이 나를 향할 때도 같은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상에게 향할 때는 정의이고, 나에게 향할 때는 폭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은 목적보다 먼저 한계를 물어야 합니다.
어떤 권력을 원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 권력을 누가 제한할 것인가. 그 권력이 잘못 움직일 때 누가 멈출 것인가. 그 권력이 나를 향할 때도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개구리들은 이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얻었지만 자유를 잃었습니다.
여우의 불과 황새의 권력
잘못을 응징하기 위해 붙인 불이 자기 밀밭을 태워버린 농부의 우화처럼, 때론 정의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수단이 예기치 못한 파멸을 불러옵니다.
여우의 꼬리에 불을 붙여 쫓아낸 농부의 비극이 처벌의 '비례성'을 말해준다면, 왕을 원했던 개구리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 그 자체의 생리'를 묻습니다. 사람들은 강력한 처벌이나 지도자를 요구할 때, 그 힘이 언제나 자신들을 향해 우호적으로만 작동할 것이라 믿습니다. 상대방을 쓸어버릴 무기가 필요한 것이지, 자신을 다스릴 주인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단 연못에 풀어놓은 거대한 힘은 결코 부른 이의 주문대로만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농부의 불이 바람을 타고 농부의 밭으로 되돌아왔듯, 개구리들의 황새 역시 그들을 보호하기보단 차례로 먹이로 삼았을 뿐입니다.
강한 힘을 요구하는 사람은 그 힘이 자신에게 돌아올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권력에 대한 오래된 회의주의
이솝 우화는 단순한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 사회에 대한 아주 오래된 정치철학입니다. 「왕을 원한 개구리들」은 그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회의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이 우화는 왕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인간 사회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권위도 필요하며, 때로는 강한 결정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권력이 어떤 제한을 받는가입니다.
통나무 왕은 무능했습니다. 황새 왕은 위험했습니다. 그러므로 답은 통나무와 황새 중 하나를 고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답은 권력을 요구할 때 그 권력의 한계까지 함께 요구하는 데 있습니다. 권력이 필요하다면 그 권력을 제한할 법도 필요합니다. 처벌이 필요하다면 그 처벌을 죄의 크기 안에 묶어둘 원칙도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필요하다면 그 지도자를 견제할 제도도 필요합니다.
개구리들이 실패한 이유는 왕을 원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한 없는 왕을 원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제한이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통나무를 비웃다가 황새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만은 강한 권력이 필요하다.” “이번만은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 “이번만은 절차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이번만은 저 사람들을 막기 위해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예외로 불러온 권력은 예외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권력은 precedent, 즉 선례를 만듭니다. 오늘 상대를 잡기 위해 허용한 힘은 내일 나를 잡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박수친 황새는 내일 내 연못으로 걸어올 수 있습니다.
황새를 부르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
「왕을 원한 개구리들」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우화는 대중을 조롱하거나 특정 정치 체제를 옹호하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요청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원초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권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그 힘이 나를 향할 때도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개구리들은 왕의 한계를 묻지 않은 채 그저 진짜 왕만을 갈구했고, 결국 질서 대신 포식자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힘을 동원할 때 자신이 황새를 부르는 연못의 지배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황새에게 잡아먹히는 나약한 먹잇감이 아닐 것이라 낙관합니다.
하지만 거대한 권력 앞에서 모든 시민은 결국 개구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제한되어야 합니다. 좋은 의도를 가졌든, 정의를 내세우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함이든, 제어할 장치가 없는 힘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누군가를 먹이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먹이는 언젠가 그 힘을 불러들인 사람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Perry Index, No. 44 (The Frogs Desiring a King).
-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How Did the Nazi Party Rise to Power?" and constitutional updates.
- Encyclopaedia Iranica, "The Iranian Revolution of 1979" & newspaper bans under Khome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