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안 교과서에는 빠진 정치 이야기 ③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칭송받는 대화와 타협, 숙의가 실제 정당 권력투쟁 속에서 실패하거나 조작되는 원인을 규명합니다. 상대방의 정치적 생존 인정과 게임 규칙을 존중하는 민주적 자제가 타협을 가능케 하는 진짜 선결조건임을 논합니다.

대안 교과서에는 빠진 정치 이야기 ③

이 글은 **대안 교과서에는 빠진 정치 이야기 ②: 사람은 왜 자신의 정치적 동기를 알기 어려운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왜 정치에서는 대화와 타협이 실패하는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대화, 타협, 관용, 숙의입니다.

정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충돌하는 영역이므로 폭력 대신 대화해야 하고, 승자독식보다 타협안을 찾아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서로의 목소리를 성실하게 들으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숙의민주주의의 이상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설명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현실 정치가 왜 이 아름다운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정치적 대화가 중단되는 이유는 단지 지식이 부족하거나 대화할 자리가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로가 협상에 들어오는 목적부터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갈등을 일정한 지점에서 끝내고 공존하기 위해 협상에 나설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쪽은 이번 합의를 최종적인 종결이 아니라 다음 요구로 이동하기 위한 중간 단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쪽은 상대를 앞으로도 함께 경쟁해야 할 정치적 파트너로 보지만, 다른 쪽은 장기적으로 제거하거나 무력화해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교육은 대화와 타협의 가치만을 가르쳐서는 부족합니다. 대화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신뢰가 없는 타협은 왜 실패하는지, 숙의와 공론화가 어떻게 권력의 정당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함께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진실이지만 더 어려운 설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무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타협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타협은 서로가 요구의 일부를 양보하고,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에서 갈등을 종결하는 방식입니다.

한쪽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지 못하고, 다른 쪽도 일부를 포기합니다. 대신 합의가 이루어진 뒤에는 약속을 이행하고, 그 결과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정합니다. 이러한 타협은 상대의 정치적 존재와 권리를 앞으로도 인정하겠다는 상호 공존의 의사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타협도 존재합니다.

현재의 힘으로 최종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얻을 수 있는 부분부터 확보한 뒤 다음 단계에서 추가 요구를 이어가는 전술적 타협입니다. 이 경우 타협은 갈등의 종결이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단계적 전진이 됩니다.

예컨대 어떤 정치세력의 최종 목표가 100이지만 현재의 여론과 세력으로는 30만 얻을 수 있다고 합시다.

30을 보장받는 타협안에 사인한 뒤 평화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30을 교두보 삼아 다시 50을 요구하고, 70, 마침내 100의 항복을 강요합니다.

이 구조에서 한쪽의 양보는 상호 신뢰의 출발점이 되지 못합니다. 다음 요구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상대 진영은 작은 양보조차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완고한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이전의 합의가 갈등의 종결이 아니라 추가 요구의 출발점으로 사용되었다면 비타협은 합리적인 방어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타협을 이러한 전술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술적 타협인지 판단하려면 경험적인 기준이 필요합니다.

합의 이후에도 같은 방향의 추가 요구가 반복되었는가. 처음부터 최종 목표를 숨긴 정황이 있는가. 상대가 양보했을 때 요구 수준을 낮추기보다 확대했는가. 권력을 얻은 뒤 상대가 다시 경쟁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제거했는가. 자신에게 불리할 때와 유리할 때 절차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는가.

이러한 증거 없이 상대의 모든 제안을 기만적 타협으로 규정한다면, 그 개념은 강경파가 모든 협상을 거부하기 위한 편리한 명분이 될 수 있습니다.

타협에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성공적인 타협에는 상대가 합의를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양보가 내일 더 큰 추가 요구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헌정의 기본 규칙이 유지될 것이라는 확신,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상대가 정치적 생존 자체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먼저 양보하는 일은 스스로의 협상력만 약화시키는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면 대화보다 버티는 것이 더 합리적인 전략이 됩니다.

그 결과 양측 모두 양보를 위험으로 보고, 상대의 비타협을 다시 자신의 비타협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불신이 불신을 낳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정치적 신뢰는 선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합의도 이행해온 기록,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 결과를 받아들인 경험, 권력을 잡았을 때도 소수파의 발언권과 재도전 기회를 보장한 관행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야 합니다.

민주공화정의 안정은 헌법 조문만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승자가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패자가 제도를 파괴하지 않으며, 양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수단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는 민주적 자제에 달려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의 정치적 생존을 인정하는 제도입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51%가 49%를 지배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오늘 패배한 소수파가 다음 선거에서 다시 권력에 도전할 수 있도록 정치적 생존 공간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집권 세력은 정부를 운영하지만, 야당의 조직과 발언권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가능성이 사라지면 선거는 정책 선택의 절차가 아니라 진영의 생존을 건 싸움으로 변합니다.

선거에서 패배하면 수사, 정당 해산, 언론 통제, 경제적 불이익과 정치적 제거가 뒤따를 것이라고 믿는 세력은 쉽게 결과에 승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상대의 재도전 가능성을 없애려 한다면 평화적 정권교체도 사라집니다.

상대의 정치적 생존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하더라도, 그가 합법적으로 조직하고 발언하며 선거에 출마할 권리는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다수 표가 국가를 영구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규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호 관용입니다.

상대가 불쾌하고 위험한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헌법적 질서 안에서 경쟁하는 정당한 정치적 상대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 대화는 불가능해집니다

현실 정치에서 도덕적 비판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헌정을 파괴하거나 부패와 폭력을 일삼는 정치세력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책 갈등을 절대선과 절대악의 전쟁으로 해석하면 민주주의의 작동 조건이 무너집니다.

상대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의 주장에는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악은 설득하거나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 제압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주장 가운데 일부라도 타당한 점을 인정하는 일은 아군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타협하는 정치인은 현실적인 조정자가 아니라 배신자로 공격받습니다. 온건한 정치인은 자신의 진영 내부에서 먼저 밀려나고, 상대를 가장 거칠게 비난하는 정치인이 지지층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대화의 실패 자체가 정치적 자산이 됩니다.

정치인은 상대와 실제 합의를 이루는 것보다 적대감을 유지하는 편이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유리할 수 있습니다. 정적에 대한 분노가 커질수록 당원과 후원자의 결속도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지속되는 이유는 상대가 완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화를 실패시키는 것이 정치적 생존에 이익이 되는 구조도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헤게모니 경쟁은 정치의 일부입니다

정치세력이 원하는 것은 특정 법률이나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을 정상적인 상식으로 볼 것인지, 어떤 언어를 정의와 인권의 언어로 인정할 것인지, 어떤 주장이 공적인 토론에서 정당한 발언권을 가질 것인지를 둘러싼 경쟁도 벌어집니다. 이것이 문화적 헤게모니 경쟁입니다.

정당과 정치세력이 의회 의석뿐 아니라 언론, 학계, 교육, 시민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문제의식이 더 널리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치 현상입니다.

문제는 한쪽이 영향력을 넓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언어만을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언어로 규정하고, 반대편의 언어와 문제의식을 발언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배제할 때 발생합니다.

이때 공론장의 규칙은 한쪽에 유리하게 기울어집니다.

상대는 형식적으로 발언할 수 있지만, 핵심 전제를 비판하는 순간 비합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존재로 규정됩니다. 대화는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미리 정해진 개념과 결론 안에서만 발언할 수 있습니다.

이 비대칭적 대화는 상호 검토의 과정이 아니라, 상대를 아군이 설정한 개념의 철장 안으로 밀어 넣는 항복 협상으로 변질됩니다.

“대화는 허용하지만 우리가 도덕적 진리로 정한 전제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실제로 허용되는 토론의 범위는 매우 좁아집니다.

진정한 공론장은 상대가 결론뿐 아니라 질문의 전제와 개념의 정의까지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숙의민주주의는 정보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숙의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다양한 관점을 듣고, 토론을 거치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이 기대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알고 있지 않으며, 토론을 통해 자신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위험과 비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보와 발언 기회만으로 숙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여자는 토론 결과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지지한 입장이 패배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결론이 나왔을 때도 절차가 공정했다면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공론화를 반복하거나, 불리한 결과가 나오면 절차의 정당성을 부정한다면 숙의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견을 검토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승인받는 과정이 됩니다.

공론장의 설계도 중요합니다.

토론 의제를 누가 정했는가. 어떤 선택지를 포함하고 제외했는가. 참가자들에게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가. 누구를 전문가로 초청했는가. 참여자를 어떤 방식으로 추출했는가. 토론 결과를 누가 요약하고 해석했는가.

이 모든 요소가 결론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숙의는 권력과 편견이 사라진 중립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의제와 절차를 설계하는 정치적 공간입니다.

공론장이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공론장은 시민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민주적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이미 원하는 결론을 정해놓고 시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직접 밀어붙이기 어려운 정책을 ‘시민 참여’와 ‘공론화’라는 형식으로 우회하여 정당화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모든 공론화가 조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설계 과정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공론장을 평가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 의제의 기획자: 토론할 의제를 누가, 어떤 이유로 선택했는가.
  • 선택지의 범위: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 충분히 제시되었는가, 아니면 특정 결론으로 유도하는 제한된 선택지만 주어졌는가.
  • 정보의 균형: 상반된 입장의 자료가 누락이나 왜곡 없이 비슷한 수준의 신뢰도와 분량으로 제공되었는가.
  • 표본의 대표성: 참여자 선정 과정에서 특정 연령, 지역, 계층이나 성향이 과도하게 포함되지 않았는가.
  • 결과의 실효성: 도출된 결론이 실제 정책과 법률에 반영될 장치가 있는가.
  • 불리한 결과의 수용: 주최한 정부나 정치세력이 원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와도 이를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가.

특히 마지막 질문은 공론화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 때는 시민의 집단지성이라고 칭찬하고, 불리한 결과가 나오면 무지나 선동의 산물이라고 폄하한다면 그 공론장은 시민의 판단을 존중하기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권력이 자신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습니다.

대화가 언제나 합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갈등이 모두 소통 부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핵심 사실과 같은 데이터를 공유하면서도 서로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상반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개발 정책이 경제적 성장을 높이지만 불평등도 확대한다고 합시다. 성장 효과와 불평등의 확대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하더라도, 성장을 우선하는 사람과 분배를 우선하는 사람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범죄율을 낮추는 감시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 예방 효과에 동의하더라도, 치안을 우선하는 사람과 사생활의 자유를 우선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정보를 더 제공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에 대한 갈등이 아니라 가치의 우선순위에 관한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표를 항상 합의로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합의에 실패하더라도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기 위한 절차와 규칙에는 합의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을 폭력 없이 관리하고, 선거와 의회를 통해 잠정적으로 결정하며, 나중에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입니다.

다수결은 잠정적인 결정입니다

대화와 숙의를 거쳐도 합의가 불가능할 때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수결은 다수의 판단이 영원한 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표를 더 많이 받았다고 해서 정책의 부작용이 사라지거나 그 결정이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결은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공동체가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절차입니다. 다음 선거와 수정의 기회가 열려 있는 잠정적 결정입니다.

따라서 승리한 다수는 현재의 표를 영구적인 권력 위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패배한 소수도 한 번의 패배를 정치적 종말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수결이 평화적으로 작동하려면 승자는 소수파의 발언권과 재도전 가능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패자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도 안에서 다음 기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승자가 심판 기관과 언론, 선거 제도를 장악해 상대가 다시 경쟁할 수 없도록 만들면 다수결은 민주적 절차가 아니라 권력 독점의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패자가 모든 불리한 결정을 부정하고 제도 밖의 힘으로 뒤집으려 한다면 선거와 의회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절차는 정의가 부족할 때 쓰는 임시방편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절차는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토론, 표결, 사법심사, 권력분립, 임기와 선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빠르게 실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수록 절차를 우회하고 싶은 유혹도 커집니다.

그러나 절차는 정의로운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사용하는 임시 장치가 아닙니다.

누가 정의로운지 모두가 합의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제도입니다. 모든 정치세력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권력을 제한하고, 잘못된 결정을 수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절차에 대한 진짜 태도는 자신에게 유리할 때가 아니라 불리할 때 드러납니다.

표결에서 패배했을 때 결과를 인정하는가. 법원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제도를 존중하는가.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에게도 표현과 조직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민주주의는 좋은 목적을 가진 사람의 선의보다, 나쁜 목적을 가진 사람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절차에 더 의존합니다.

모든 타협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타협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사법부와 선거 제도를 무력화하는 합의는 좋은 타협이 아닙니다. 강한 세력이 약한 세력에게 일방적인 굴종을 요구하면서 이를 타협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서로의 권력을 보장받는 대신 시민의 감시를 약화시키거나, 조직화된 집단끼리 이익을 나누면서 비용을 제3자에게 전가하는 합의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타협을 평가할 때는 다음을 살펴야 합니다.

합의가 양측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는가. 권력의 차이를 이용한 강요는 아니었는가. 약속이 지켜질 신뢰가 있는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제3자의 권리를 희생시키지는 않았는가.

좋은 타협은 공존의 공간을 넓힙니다. 나쁜 타협은 특권과 부패를 강화합니다.

타협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과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정치교육은 갈등의 존재를 숨겨서는 안 됩니다

정치교육은 갈등을 민주주의의 실패처럼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재산과 경험을 가지며, 서로 다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갈등은 이러한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정치의 목적은 갈등을 완전히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등이 폭력과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법과 제도의 안에서 표현하고 조정하는 데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충분히 대화하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의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서는 오랜 대화 뒤에도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가치에 대해서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것이 책임 있는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민주 시민의 중요한 능력은 모든 사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다른 상대를 공론장에서 제거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분노와 갈등이 남아 있더라도 상대의 합법적인 발언권과 정치적 생존을 인정하고, 자신이 패배했을 때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규칙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정치적 성숙은 갈등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갈등 속에서도 선을 넘지 않는 자제의 상태입니다.

대안 교과서에 빠진 세 번째 정치 이야기

대화와 타협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선한 의지나 따뜻한 태도만으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합의를 종결로 인정하는 태도, 상대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 오늘 패배하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다시 경쟁할 수 있다는 제도적 보장, 정적의 정치적 생존을 파괴하지 않는 관용,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도 받아들이는 민주적 자제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무너지면 타협은 갈등을 끝내는 합의가 아니라 다음 요구를 위한 임시 단계로 바뀝니다. 숙의와 공론화 역시 결과를 미리 정한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상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합의를 지키고 패배를 수용하며 반대파의 정치적 생존을 보장해야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내가 정의의 화신이라는 확신은 자기 진영의 권력 확대를 정의의 확대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반대파의 발언권과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믿게 합니다.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절차와 견제는 개혁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정치교육은 학생들에게 단순히 대화하고 타협하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대화가 왜 실패하는지, 반복된 합의 파기가 어떻게 신뢰를 파괴하는지, 공론화 절차를 설계하는 권력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민주주의가 왜 상대의 생존과 자신의 패배까지 감수해야 하는 제도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민주공화정은 모든 국민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서로 생각과 이익을 합칠 수 없는 사람들이 상대를 법과 제도 밖으로 추방하지 않고, 같은 규칙 아래에서 평화롭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체제입니다.

대안 교과서에 빠진 세 번째 정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대화와 타협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아니라, 상대의 정치적 생존과 불리한 결과까지 받아들이려는 자제 위에서만 가능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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