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탈리 우드의 사망과 얽힌 잔인한 이야기


토머스 노구치의 《Coroner》를 바탕으로 나탈리 우드의 마지막 밤과, 그 죽음 이후 로버트 와그너에게 덧씌워진 이야기의 잔인함을 돌아봅니다.

나탈리 우드의 사망과 얽힌 잔인한 이야기

나탈리 우드의 죽음은 오랫동안 할리우드의 미스터리로 소비되었습니다.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과 함께 청춘의 불안과 아름다움을 상징했던 배우, 밤의 요트, 남편 로버트 와그너, 함께 있었던 배우 크리스토퍼 워컨, 그리고 차가운 바다. 이 요소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1981년 11월 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섬 근처의 요트 _Splendour_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밤 요트에는 남편 로버트 와그너와 배우 크리스토퍼 워컨도 함께 있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그녀는 사라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시신은 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작은 고무보트인 딩기는 해안가에 닿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의혹이 생길 만한 정황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나탈리 우드는 외출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잠옷, 양말, 그리고 다운 재킷 차림이었습니다. 그녀가 어딘가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딩기를 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딩기는 요트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고, 그녀의 시신은 요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같은 배에는 남편 와그너와 워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녀가 물에 빠지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그날 밤 와그너와 워컨 사이에 감정적 긴장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술이 있었고, 밤이었고, 배 안에는 부부와 손님이 있었습니다. 이런 조건이 겹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그 밤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까. 그녀는 왜 밖으로 나갔을까. 누군가와 다툰 뒤 혼자 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이 질문들은 정당합니다. 이상한 죽음 앞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수사와 검시는 그런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죽은 사람이 말을 할 수 없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설명에 빈칸이 남아 있을 때 의혹은 더 쉽게 커집니다.

그러나 의문은 증거가 아닙니다. 설명되지 않은 빈칸은 조사되어야 하지만, 그 빈칸이 곧 한 사람의 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탈리 우드의 죽음을 볼 때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의혹이 생길 만한 정황이 있다는 것과, 그 의혹이 범죄를 입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이 토머스 노구치의 《Coroner》입니다. 노구치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관으로서 마릴린 먼로, 로버트 케네디, 샤론 테이트, 재니스 조플린, 존 벨루시 같은 유명 인물들의 죽음을 다룬 사람입니다. 그는 나탈리 우드의 죽음도 할리우드의 소문이 아니라 법의학자의 시선으로 봅니다.

노구치의 시선은 대중의 상상보다 차갑습니다. 그러나 그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더 슬픈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가 본 나탈리 우드의 죽음은 살인극보다 더 허무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잔인한 사고에 가까웠습니다.

노구치는 폴 밀러의 보고를 중요하게 봅니다. 밀러는 요트 사고와 카탈리나 해역을 잘 아는 인물이었고, 그날 밤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는 요트의 위치, 딩기의 상태, 바람, 조류, 주변 소음, 해안 지형을 살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음모의 구조라기보다 사고의 구조입니다.

딩기에는 누군가가 타고 나간 정황이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시동은 꺼져 있었고, 기어는 중립이었고, 노도 묶여 있었습니다. 나탈리 우드가 딩기를 몰고 어디론가 가려고 했다고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딩기를 묶은 줄을 확인하거나, 딩기가 요트에 부딪히는 것을 처리하려다가 물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녀는 물에 빠진 뒤 죽음을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으려고 했습니다. 딩기를 붙잡았고, 그 안으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몸에 남은 멍은 그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때렸다는 이야기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바다에서 딩기에 올라타려고 몸을 부딪치며 버틴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밤바다에서 젖은 옷은 무거워집니다. 그녀가 입고 있던 다운 재킷은 물을 머금으면서 몸을 끌어내리는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딩기의 둥근 고무벽은 물속에서 잡고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힘은 빠지고, 손과 다리는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탈리 우드는 딩기를 붙잡은 채 해안 쪽으로 나아가려 했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바람은 딩기를 밀어냈고, 그녀는 그 움직임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 손으로는 딩기를 붙잡고, 다른 손과 다리로 물을 저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당한 거리를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죽음이 더 잔인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바다 한가운데서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해안까지 갔습니다. 딩기는 결국 해변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나탈리 우드는 그 전에 힘을 잃었습니다. 차가운 물, 젖은 옷, 탈진, 저체온이 마지막 남은 의식을 빼앗았을 것입니다.

비극은 때로 너무 멀어서 슬픈 것이 아닙니다. 거의 닿았기 때문에 더 슬픕니다.

조금만 더 버텼다면, 조금만 더 빨리 누군가 알아차렸다면, 조금만 옷이 가벼웠다면, 조금만 바람이 약했다면, 조금만 물이 덜 차가웠다면, 그녀는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고는 큰 악의에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작은 조건들이 한 방향으로 겹칠 때도 생깁니다. 밤, 술, 추위, 소음, 요트, 딩기, 바람, 젖은 재킷, 늦은 발견. 각각은 하나의 조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닥치면 죽음이 됩니다.

나탈리 우드는 두 아이를 남겨둔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사건은 충분히 잔인합니다. 한 사람이 차가운 밤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고, 거의 해안까지 갔지만 끝내 닿지 못했습니다. 토머스 노구치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죽음의 과정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드라마로 만들기보다, 한 인간의 몸이 밤바다에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를 추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주 그런 설명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탈리 우드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했는지보다, 누가 무엇을 숨겼는지를 더 궁금해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했는지보다, 남편 로버트 와그너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더 묻고 싶어했습니다.

물론 와그너에게 의혹이 향한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같은 배에 있던 남편이었습니다. 그 밤에 부부와 손님 사이에 어떤 감정의 흔들림이 있었는지 외부인은 알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고, 살아남은 사람의 설명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게다가 부부 사이의 문제는 밖에서 모두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빈칸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빈칸은 죄가 뇌입니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을 비극의 범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의혹은 조사되어야 하지만, 의혹이 곧 판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대중의 의혹은 더 위험합니다. 대중은 법정이 아니고, 소문은 증거가 아니며, 상상력은 진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 사건은 나탈리 우드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사고는 너무 허무합니다. 우연과 실수와 늦은 발견과 차가운 바다가 한 사람을 죽였다는 설명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 설명에는 악역이 없습니다. 동기도 없습니다. 교훈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완성된 이야기를 원합니다. 누가 무엇을 숨겼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그 밤에 보이지 않는 어떤 진실이 있었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위험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스토리텔링을 거의 무조건 좋은 것으로 말합니다. 상품도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정치도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개인의 삶도 이야기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흩어진 사실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기억하게 만들고, 사건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실을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사실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그럴듯해지면 사람들은 증거보다 구조를 믿습니다. 남편이 있었고, 다른 남자 배우가 있었고, 술이 있었고, 언쟁이 있었고, 여자가 죽었습니다. 이 요소들은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것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공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탈리 우드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누구나 마음이 흔들립니다. 젊은 배우가 차가운 바다에서 죽었고, 두 아이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더구나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으려 했고, 거의 해안에 닿을 뻔했다는 해석을 접하면 슬픔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공감이 강해질수록 조심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공감은 진실을 찾는 힘이 될 수 있지만, 때로는 분노할 대상을 찾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고통받은 사람에게 깊이 공감할수록 사람들은 누군가를 벌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비극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가해자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고가 잔인하다고 해서 그 잔인함을 누군가의 악의로 바꾸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진실을 찾게 만들 수도 있지만, 진실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로버트 와그너를 생각하면 이 사건은 다른 슬픔을 갖게 됩니다. 만약 그가 범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내를 잃은 남편입니다. 그것도 평범한 방식으로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던 여행에서, 같은 배에 있던 밤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었습니다. 그런 죽음은 남겨진 사람에게 견디기 어려운 죄책감을 남깁니다. 왜 몰랐을까. 왜 듣지 못했을까. 왜 더 일찍 찾지 못했을까. 사람은 직접 죽이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벌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에게 슬픔만 남기지 않았습니다. 의혹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남편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등장인물로 보았습니다. 애도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사람인 동시에, 오랫동안 의심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나탈리 우드의 사망과 얽힌 잔인한 이야기는 처음에는 밤바다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차가운 물, 젖은 재킷, 풀린 딩기, 거의 닿을 뻔한 해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더 잔인한 이야기는 바다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뭍에 남은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우연을 견디지 못했고, 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허무한 죽음 앞에서 누군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슬픔은 공감이 되었고, 공감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의심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야기를 완성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자리에 로버트 와그너가 놓였습니다.

만약 그가 범인이 아니었다면, 세상은 한 사람에게서 아내만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슬퍼할 권리까지 빼앗은 셈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습니다. 슬픔은 의혹으로 덮였고, 애도는 추문으로 바뀌었고, 사고는 사람들이 즐겨 소비하는 미스터리가 되었습니다.

나탈리 우드의 마지막 밤은 잔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어쩌면 더 잔인했습니다. 바다는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지만,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는 남겨진 사람의 삶까지 오래도록 물속에 붙잡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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