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파울루 포럼이 미국 남부 국경위기를 직접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실보다 앞서 나가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의 남부 국경위기를 이해하려면 상파울루 포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좌파가 국경, 이주, 시민권, 반미주의를 어떤 언어로 해석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상파울루 포럼은 1990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출범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 좌파 정당·정치운동의 국제 네트워크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권이 붕괴하던 시기, 라틴 좌파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아야 했습니다. 무장투쟁의 시대는 약해지고 있었고, 선거, 시민운동, 문화 담론, 국제연대가 더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포럼은 그런 전환의 상징이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시대가 총과 게릴라의 시대였다면, 상파울루 포럼의 시대는 정당, NGO, 국제회의, 인권 담론, 이주민 권리의 시대였습니다. 혁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었습니다. 산악 게릴라의 언어는 약해졌지만, 반미주의와 반신자유주의, 국경 없는 세계와 보편적 시민권의 언어는 남았습니다.
트럼프에게 남부 국경은 주권의 문제였습니다. 국가는 누가 들어오고, 누가 시민이 되며, 누가 복지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국경이 없다면 시민권의 의미도 흐려지고, 복지의 책임 범위도 흐려지며, 민주주의의 결정권도 흐려지습니다.
그러나 좌파적 국제주의의 언어에서 국경은 쉽게 억압의 장치로 해석됩니다. 이주민은 정치적 주체가 되고, 국경 통제는 인종주의나 배제의 언어로 비판됩니다. 국가가 국경을 관리하려 하면, 그것은 곧 약자에 대한 공격처럼 묘사됩니다. 이 지점에서 남부 국경위기는 단순한 이민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충돌이 됩니다.
상파울루 포럼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비밀 지휘부가 아닙니다. 미국 남부 국경으로 몰려드는 이주민 행렬을 직접 조종한 조직이라고 말할 근거도 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냉전 이후 라틴 좌파가 국경, 시민권, 이주민 권리, 반미주의를 어떻게 정치 언어로 결합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2018년 하바나에서 열린 상파울루 포럼 선언문은 “국경 없는 세계와 보편적 시민권”을 해방 투쟁의 지향으로 말했습니다. 이 문장은 인도주의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국경 없는 세계는 단순히 따뜻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 주권과 시민권의 경계를 다시 쓰겠다는 말입니다.
국경은 단지 사람을 막기 위한 선이 아닙니다. 국경은 책임의 경계입니다. 국가는 국경을 통해 누구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누구를 법적으로 보호하며, 누구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인지를 정합니다. 국경이 약해지면 그 책임의 구조도 약해집니다. 그런데 좌파적 국제주의는 이 문제를 자주 인도주의의 언어 하나로 덮어버립니다.
물론 이주민 개인을 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이주민은 가난, 폭력, 부패, 경제 붕괴를 피해 더 나은 삶을 찾아 이동합니다. 그들의 고통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정치의 문제는 개인의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 그 이동을 이용하는가, 누가 그 흐름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가,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트럼프의 남부 국경위기는 바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국경을 통제하자는 말은 왜 곧 혐오로 취급되는가. 불법 이주를 막자는 말은 왜 반인권으로 해석되는가. 시민권과 복지, 치안과 노동시장, 선거제도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은 왜 이민자의 고통 앞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는가.
상파울루 포럼을 보면 이 질문의 배경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틴 좌파는 오랫동안 미국을 제국주의 권력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미국 국경은 단순한 행정선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계질서의 상징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주민의 이동은 개인의 생존 전략이면서 동시에 제국의 중심부로 향하는 정치적 흐름이 됩니다. 이때 국경 통제는 치안 정책이 아니라 억압의 상징이 됩니다.
이것이 트럼프와 좌파 진영이 남부 국경을 전혀 다르게 본 이유입니다. 트럼프는 국경을 국가 질서의 마지막 선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좌파 국제주의는 국경을 낡은 배제 장치로 보았습니다. 한쪽은 주권을 말했고, 다른 한쪽은 해방을 말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병법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병법은 상대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보다, 그 언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봅니다. “국경 없는 세계”라는 말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국가의 통제력 약화, 치안 부담 증가, 복지 비용 전가, 시민권 의미의 약화라면, 그것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전략으로 작동합니다.
상파울루 포럼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미국 남부 국경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위기를 정당화하고 해석하는 좌파적 언어의 한 배경입니다. 마리엘 보트리프트에서 카스트로가 인도주의를 무기로 바꾸었다면, 냉전 이후 라틴 좌파는 국경과 시민권의 문제를 해방 담론으로 바꾸었습니다.
보수주의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이주민 개인을 악마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약합니다. 그러나 이주민의 고통을 이유로 국경과 시민권, 국가 책임의 문제를 묻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볼수록, 그 고통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용되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경계 위에 서 있습니다. 선거에는 유권자의 경계가 있고, 복지에는 부담 공동체의 경계가 있으며, 시민권에는 소속의 경계가 있습니다. 경계가 모두 억압이라고 말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자신을 유지하는 구조를 잃습니다.
트럼프의 남부 국경위기는 그래서 단순한 이민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현대 민주주의가 자기 경계를 지킬 수 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상파울루 포럼은 그 반대편에서 작동하는 세계관을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총을 든 혁명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국경 없는 세계라는 말로 다가오는 혁명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도주의의 언어를 사용하고, 권리의 언어를 사용하며, 연민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국가와 시민권의 경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선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체 게바라는 폭력을 낭만화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인도주의를 무기화했습니다. 상파울루 포럼은 국경과 시민권의 문제를 국제 좌파의 언어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흐름을 알아야 트럼프의 남부 국경위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주민이 아니라, 이주를 둘러싼 정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가 국가의 경계를 어떻게 약화시키는가입니다.
참고문헌
Foro de São Paulo. Declaración del XXIV Encuentro del Foro de São Paulo. La Habana, Cuba, 2018. Official Forum Declaration
Weyland, Kurt, Raúl L. Madrid, and Wendy Hunter, eds. Leftist Governments in Latin America: Successes and Shortcom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Greenhill, Kelly M. Weapons of Mass Migration: Forced Displacement, Coercion, and Foreign Policy.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2010.
“Fórum de São Paulo.”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F%C3%B3rum_de_S%C3%A3o_Pau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