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알린스키를 몰랐지만 알린스키식으로 행동한 도시, 광주


광주의 대형 쇼핑몰 진입 무산과 투자 유치 지연 등의 실제 사례들을 미국의 지역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의 갈등 조직화 전술에 빗대어 분석하고, 실리를 가로막는 운동정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알린스키를 몰랐지만 알린스키식으로 행동한 도시

광주의 장기적인 경제적 쇠퇴를 단순히 지리적 여건이나 거시적 경제 지표의 악화만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수도권 집중 현상, 전통 제조업 구조의 취약성, 인구 감소 같은 고질적인 외적 조건들이 작용했음은 자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독 광주에서만 대형 유통시설 유치나 복합 쇼핑몰 진입이 수십 년 동안 집요하게 무산되고 기업 투자 계획이 정쟁 속으로 침전한 현상을 충분히 해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의 기저에는 경제적 실리와 도시개발의 효율성보다 정치적 이념과 진영적 선악 구도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특유의 지역적 사고방식이 또렷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업 유치가 가져올 장기적인 일자리 세수 창출 효과나 소비자 편익의 가치보다는, '누가 서민과 약자의 편이고 누가 탐욕스러운 대기업의 편인가'라는 도덕적 대립각을 세우는 데 온 정성을 쏟은 탓에, 시민 다수의 무형적 혜택보다 상인회, 노동조합, 시민단체와 같이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들의 전술적 목소리가 시정을 완전히 압도해 왔습니다.

운동정치가 지배하는 도시의 역설

이러한 행태는 과거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던 전형적인 "기계정치"와는 미묘한 결의 차이를 보입니다. 예컨대 계파 보스가 일자리나 금품 등의 사적 자원을 배분하며 충성 표밭을 다지는 노골적인 후견주의 정치 구조라기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끊임없이 기획하고 거대한 공동의 적을 상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재생산하는 "운동정치"는 광주 지역 사회의 헤게모니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광주의 이러한 갈등 중심적 정치 지형이 미국의 전설적인 지역조직가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가 저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등에서 정립했던 급진적 전술 이론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광주의 전통시장 상인들이나 시민단체 활동가들, 노조원들이 실제로 알린스키의 서적을 정독하고 조율된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다수는 그의 이름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인간은 특정한 학술 이론을 전혀 학습하지 않더라도 처한 생태적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론과 완전히 동일한 생존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알린스키를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충실한 알린스키주의자처럼 기능해 온 것입니다.

경제적 주체를 도덕적 적으로 규정하는 메커니즘

대형 유통기업이나 대규모 복합 쇼핑몰이 한 도시에 들어서고자 할 때,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지자체 행정은 철저하게 경험주의적 비용 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서 출발해야 마땅합니다. 투자의 총규모, 신규 고용 유발 인원, 지역 하도급 공사 참여율, 세수 증대 효과뿐만 아니라 기존 골목상권에 미칠 파장과 교통 유발 부담금 수준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세밀하게 저울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을 양분 삼아 돌아가는 운동정치가 시정을 포섭하는 순간, 이 모든 객관적인 행정 검토의 우선순위는 뒤로 밀리고 도덕적인 감정 검열이 대화의 초반부를 점령하게 됩니다. '대기업 자본이 지역의 부를 빨아들여 본사로 송출한다', '전통시장의 영세 상인들을 학살한다', '약자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다'와 같은 원색적이고 감정적인 질문들이 먼저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 시점부터 유통 대기업은 타협하고 조건을 조율해야 할 상호 호혜적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침략자이자 도덕적 절대악으로 규정됩니다.

이러한 프레임 전환이 완수되면 복합 쇼핑몰 유치 문제는 더 이상 소비자 편익이나 도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조율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약자를 끝까지 수호할 것인가, 아니면 대기업의 편에 서서 영혼을 팔 것인가'라는 절대적인 흑백 대결의 장으로 축소되는 까닭입니다. 쇼핑몰 입점에 찬성하거나 다른 합리적인 개발 방식을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시민은 합리적인 토론 파트너가 아니라 공동체를 배신한 강자의 프락치처럼 취급받기 일쑤며, 선거에 나서는 지역 정치인들 또한 복합몰 유치를 통한 경제 활성화 효과를 차분히 설득하기보다 자신이 영세 상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진정한 아군이라는 상징적 서사를 증명하는 데 급급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를 도덕적으로 절대 악마화하고, 복잡한 현실을 '우리 대 저들'의 단순한 적대 구도로 찢어 발기는 알린스키식 갈등 정치의 핵심 요체입니다.

'상생'이라는 도그마와 협상의 부재

광주에서 여러 대형 투자 유치 사업을 가로막았던 표면적 깃발은 언제나 '영세 소상공인과 골목상권의 상생'이었습니다. 대기업 유통점이 도시로 들어오는 순간 그 가공할 만한 소비 흡입력으로 주변 전통시장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놓을 것이라는 파국론적 가정이 모든 논의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소상공인을 보호하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 반드시 대기업을 도시 밖으로 축출하는 원천 차단 방식이어야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업에 신규 인력의 지역민 의무 채용 비율을 강제하고, 건설 공사에서 지역 시공업체 지분을 대폭 보장받으며, 매장 내 지역 농산물 상설 납품 코너를 개설하고, 전통시장 현대화 기금을 매년 적립하게 하는 등 협상을 통해 지역의 실질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현실 타협적 카드는 얼마든지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운동정치 생태계 속에서는 이러한 유연한 타협안이 극도로 기피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타협안을 수용하는 순간 대기업을 향한 선명한 적대 전선이 붕괴하고, 대화 테이블이 열리면 더 이상 상대를 절대악으로 몰아세우며 구성원들을 선동할 투쟁의 에너지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기여금을 받아내고 양보하는 세련된 타협보다, 사업을 완전히 좌초시켜 대기업 자본을 물리치고 향토 상권을 지켜냈다는 극적인 승리 서사를 쟁취하는 것이 운동조직의 결속과 권력 획득에는 훨씬 유리한 구조적 동기가 작동합니다.

그러나 이 투쟁의 승리가 정작 도시 전체와 평범한 대중의 생존적 승리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대기업 쇼핑몰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광주의 청년들과 소비자들이 애국심에 고무되어 전통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말이 되면 인근 대전이나 세종, 부산 등 쇼핑 인프라가 갖추어진 타 도시로 빠져나가 소비를 지출하거나 대형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지갑을 열었습니다. 영세 상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막아 세운 것은 대기업 쇼핑몰만이 아니라, 광주 내부에서 순환하고 축적되었어야 할 대중의 거대한 소비력 그 자체였습니다. 경쟁자는 성공적으로 몰아냈으나 고객마저 함께 쫓아버린 기이한 공동화 현상이었습니다.

앵커시설의 유치와 소비의 선순환

현대 상업 도시계획에서 대형 복합 쇼핑몰과 골목상권은 단순한 제로섬(Zero-sum) 관계의 천적으로 기획되지 않습니다. 소비자의 소비 목적과 성향에 따라 시장은 미세하게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이나 복합몰은 대개 외식, 여가, 문화 체험, 고급 선물 구매 등 주말의 여유를 소비하는 목적형 나들이를 타깃으로 삼는 반면, 전통시장과 동네 식료품점은 일상적인 식재료 구매나 밀착형 생활 밀착 소비를 유도합니다. 대규모 앵커시설이 외지 인구를 대량으로 도심에 끌어들이면, 그들이 집객된 효과로 인해 주변 원도심 상권과 식당가, 지역 전통시장까지 활력을 얻는 분수 효과(Fountain Effect)와 폭포 효과(Waterfall Effect)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대전의 신세계 백화점과 로컬 랜드마크인 성심당, 그리고 대전 원도심이 보여준 유기적 집객과 상생 구조는 이 앵커시설의 선순환 효과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실증 사례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와 행정이 던졌어야 할 올바른 질문은 '어떻게 대기업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대기업이 유발할 막대한 집객 효과를 어떻게 설계하여 우리 골목상권으로 부드럽게 흘러가게 만들 것인가'여야 했습니다. 광주 사회에 절실히 부족했던 것은 대기업에 맞서 싸우겠다는 도덕적 맹목성과 선동적 구호가 아니라, 냉정한 통계 자료와 타 도시의 실증적 연구 결과를 분석하여 지역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경험적 지성과 비즈니스적 감각이었습니다.

조직된 소수의 압력과 정치인의 보신주의

여기서 마주하게 되는 진짜 의문은 왜 지역의 국회의원들과 시장, 구청장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 불합리한 쇠퇴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방치해 왔느냐는 점입니다. 행정과 정치를 업으로 삼는 그들이 복합 쇼핑몰이 유발할 수천 명의 일자리와 수백억 원의 세수, 그리고 도시 낙후화 방지 효과를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못했을 리 만무합니다. 결국 원인은 정치 공학적인 득실 계산에 있습니다. 복합몰 유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비록 다수를 점할지언정 조직되어 있지 않고, 투표장에서 적극적인 압력 단체로 돌변하지 않는 이완된 군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입점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상인회, 노동조합,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상근 인력과 동원력을 지닌 단단한 결사체입니다. 이들은 언론 성명을 내고, 시청 앞 광장에서 격렬한 규탄 집회를 열며, 선거철이 되면 후보의 목줄을 쥐고 공천과 표밭을 뒤흔들 실질적 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신주의에 물든 정치인들에게는 다수 시민의 분산된 장기적 이득보다, 조직된 소수의 강력하고 집요한 즉각적 보복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공포스러운 정치적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의 세수를 확보하는 모험보다 당장 내 선거를 망치려 드는 압력 단체들의 요구를 묵인하며 달래는 편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영리한 보신 전략인 것입니다. 여기에 지역 사회를 휘감은 독특한 도덕적 헤게모니가 결합하면 보신은 정의로 둔갑합니다. 상인회는 지역 전통과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고, 시민단체는 공익을 대표한다는 신성한 자격을 획득했기에, 이들의 기득권적 요구에 맞서 균형을 잡으려는 정치인은 졸지에 대기업에 아부하고 약자를 저버린 파렴치범으로 매도당하게 됩니다. 정치는 정책의 효용을 조율하는 실무적 장이 아니라, 자신이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정의로운 진영에 속해 있는지를 매 순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일종의 도덕 재판소가 되고 맙니다.

갈등을 생존 자원으로 삼는 영구투쟁의 구조

알린스키가 제시한 운동 조직론에서 갈등은 기피해야 할 병리 현상이 아니라, 조직을 살찌우고 유지하는 가장 귀중한 핵심 연료로 간주됩니다. 뚜렷하고 거대한 적대 세력이 외부에서 나를 겨누고 있을 때만,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지리멸렬한 내부 구성원들을 단일한 지휘 체계 아래 일사불란하게 뭉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구적인 투쟁 체제에 의존해 생존하는 조직일수록 갈등의 실제적인 종결과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달가워하지 않는 역설적인 동기를 품게 됩니다. 기업과의 대타협을 통해 합리적인 조율을 마치고 갈등이 해소되어 평화가 정착되면, 상인들이나 조합원들이 더 이상 매월 회비를 납부하며 강경파 지도부의 선동에 귀를 기울이고 집회장에 동원되어 소리 높여 싸워야 할 실존적 이유가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영구히 지속될 때야말로 운동조직의 지도부는 투쟁 대표로서의 권력적 지위를 연장할 수 있고, 지역 정치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계속 받아쓰며 선명한 약자의 동반자라는 상징 자산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복제 구조가 고착화되면, 모든 정책 결정의 진짜 목적은 지역 상권 활성화나 고용률 제고라는 현실적 결과물이 아니라, 투쟁의 과정 자체를 장기화하여 조직의 생존과 도덕적 동맹의 지배력을 영구히 보존하는 영구투쟁 그 자체가 되고 맙니다.

노동권의 이념화와 고용 안정성의 역설

이와 같은 이념적 도그마와 알린스키식 대결 구도는 유통 상업 부문뿐만 아니라 지역 제조업 생태계마저 심각하게 잠식해 왔습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보장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임금 인상 요구는 헌법이 보장한 신성한 권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개별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고, 기술 변화의 파도를 맞닥뜨려 생존 그 자체를 건 위기 국면에 처했을 때는 노동운동 역시 고집스러운 이념 투쟁에서 벗어나 타협의 시기와 생산성 제고 방안을 함께 교환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보였어야 마땅합니다. 노동권의 진정한 본질은 단순히 오늘의 명목 임금을 극대화하는 투쟁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일자리의 터전인 기업이 내일도 살아남아 생태학적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고 미래 세대에게도 양질의 일자리를 물려주는 영속적인 고용 안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투쟁의 선명성과 강경한 교조주의가 노동운동의 유일한 도덕적 잣대로 승인받는 생태계에서는 현실적인 양보나 사측과의 고통 분담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변절이자 투항으로 손쉽게 처단됩니다. 기업의 실질적인 유동성 위기나 공장 가동 중단의 파국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사용자를 타도해야 할 불공정 가해자로만 고정하는 탓에 생산성 회복을 위한 유연한 대타협은 원천 차단되고 맙니다. 기업이 파쇄되어 공장이 멈추고 자본이 지역을 영구히 이탈한 이후에는, 아무리 강경하고 숭고한 노조 헌장이나 이념적 깃발을 치켜든들 사라진 일자리와 경제의 붕괴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준엄한 생태 법칙을 그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에서 좌초된 기업 투자의 자화상

이러한 갈등 일변도의 운동정치는 단순히 추상적인 경제학적 우려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광주의 현대사는 대기업의 신규 진입이나 기존 기업의 핵심 자산 재배치가 정치권의 방조와 시민단체의 집요한 텃세 속에서 좌초하고 지연되어 온 상흔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본격적으로 타올랐던 '광주신세계 복합개발 사업'의 침몰입니다. 광주시와 신세계는 당시 랜드마크급 특급호텔과 문화·레저·쇼핑 공간이 융합된 복합 시설을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이전에 완공하는 내용의 정식 투자협약(MOU)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협약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일부 강경 상인 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격렬한 반발이 시청을 포위했고, 야당 정치권이 이에 적극 가세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갔습니다. 야당 을지로위원회가 입점 전면 재검토를 촉구하며 압박했고, 유력 대선 주자였던 문재인 대표까지 상인 편에 서서 백지화 권고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서사를 더하자 행정은 한순간에 마비되었습니다. 광주시가 판매 시설 면적의 제한을 들고나오며 등을 돌리자 기업은 결국 계획을 철회했고, 이후 규모를 대폭 축소한 우회 시도마저 표류하다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행정이 기업과 맺은 정식 약속을 정치적 압력 단체의 호통 한마디에 헌신짝처럼 버리는 모습을 목격한 외부 자본들은 광주라는 도시의 행정적 신뢰성에 깊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홈플러스 주월점의 출점 잔혹사 역시 광주 행정의 비공식적 장벽을 증명합니다. 홈플러스가 2000년대 초반 주월동에 대형 점포를 지으려 신청했을 때, 담당 지자체는 소상공인 피해 등의 명분을 들어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종 승인을 미루고 거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적법 심사를 넘어선 정치적 고사 전술이었으며, 결국 지칠 대로 지친 기업이 2010년 투자를 공식 포기하고 퇴각함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마트 매곡점 사태는 시민단체의 조직적 저항과 지방정부의 소송전이 얽힌 복합적 폐해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이미 합법적으로 북구청의 건축 허가까지 득했던 기업이었으나, 시민단체들의 반대 대책위가 주민감사청구를 제기하고 구청장을 윽박지르자 지자체는 이미 내주었던 허가를 취소하는 무리수를 범했습니다. 이후 수년간 이어진 지리멸렬한 행정 소송 속에서 하급심과 대법원의 법리 판단이 요동치는 동안, 기업이 감당해야 했던 무형의 리스크와 기회비용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광주가 기업을 적대하고 방어하는 법적·정치적 늪을 가진 도시로 낙인찍히자, 신규 투자는 완전히 멈추어 섰을 뿐 아니라 이마트 상무점과 동광주점 등 기존 거점 매장들마저 차례로 간판을 내리고 철수하는 공동화가 일어났습니다.

대기업 유치뿐만 아니라 향토 기업인 금호타이어의 공장 이전 지연 문제 역시 행정 불확실성의 그늘을 여실히 투영합니다. 노후화된 도심 공장을 함평 빛그린산단으로 이전하고, 기존 부지를 상업적으로 개발하여 그 매각 대금으로 이전 비용과 막대한 부채를 갚으려 했던 기업의 합리적 재무 전략은 '대기업 특혜 방지'라는 이념적 사슬에 묶였습니다. 지자체가 부지 용도변경을 극도로 지연시키며 특혜 의혹 시비의 책임 공방 속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공장 이전은 오랜 세월 표류했고 노후 공장의 고용 기반은 악화 일로를 걸었습니다. 노사민정 합의로 출범했던 국내 최초의 상생형 완성차 공장인 광주글로벌모터스(GGM) 또한 초기 기획과 달리 노조가 결성되자마자 강경 투쟁과 고소·고발, 경영진 퇴진 운동의 구렁텅이로 빠져들며 '광주형 일자리'라는 실험 모델 자체가 침몰하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시는 노사 중재의 중심에 서지 못한 채 양 진영의 눈치만을 살폈고, 결국 '약속과 신뢰는 깨어지고 투쟁만 남는다'는 지역 정치의 씁쓸한 도그마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러한 개별 사례들의 법적 하자와 도시계획적 쟁점을 모두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기업의 잘못이나 행정의 무능으로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좌초 사례들을 관통하는 구조적 패턴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투자와 개발을 상호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비즈니스 협상'의 영역으로 수용하여 다스리지 않고, 외부 대자본이라는 '도덕적 공적'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투쟁의 연극으로 판을 짰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투쟁 조직들은 대기업을 몰아냈다는 상징적 훈장을 얻고 세력을 온존했으나, 광주 시민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잃었고, 지방정부는 세수의 기반을 상실했으며, 청년들은 일할 곳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혹독한 대가를 분담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자가 된 저항자의 언어

알린스키의 주민 조직 전술은 그 역사적 시초에 있어서는 사회적·정치적 권력이 완전히 결여된 도시 빈민과 영세 상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집단적 협상력(Bargaining Power)을 부여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습니다. 자본과 행정 권력을 독점한 거대 기득권에 대항하기 위해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조직된 갈등'을 전술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자의 전술이 특정 지역 사회 내에서 무려 수십 년 동안 주류 정당, 강성 노조, 거대 시민단체의 동맹 체제 아래 지배적인 권력 도구로 정착하게 되면, 그 전술적 성격은 기만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지역의 예산 배분, 인사 공천, 조례 제정, 그리고 여론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기득권 집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자신들을 핍박받는 약자이자 저항자로 끊임없이 위장합니다. 거대 대기업이나 머나먼 중앙정부를 영구적인 강자와 지배자로 설정해 두고, 자신들의 지배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실리를 따져 묻는 평범한 시민들조차 '기득권의 하수인'이자 '대기업의 부역자'로 공격하며 권력을 유지합니다. 지배력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약자의 비장한 문법을 독점하여 방어막을 치는 비겁한 권력의 자화상입니다. 이 모순적 구조 속에서 조직화되지 못한 진짜 서민들의 다양한 소비 선택권과 일하고 싶은 청년들의 기회는, 기득권을 쥔 운동조직의 도덕적 명분을 위해 언제나 부차적인 희생양으로 소모될 뿐입니다.

지역 헤게모니가 실리를 가리다

이 비극적인 상태를 두고 단순히 '진보 세력이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모르는 아마추어였기 때문'이라 치부하는 것은 본질을 빗나간 분석입니다. 그들은 실리적 대안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투자 효과와 실리를 명시적으로 승인하는 순간 자신들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운동의 정당성 자체가 뿌리째 뒤흔들릴 수 있음을 알았기에 그 진실을 외면한 것에 가깝습니다. 대기업의 유입이 지역 소득 증대와 고용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엄연한 데이터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그동안 대기업을 악으로 규정하며 세력을 다져온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이 거짓으로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책의 참담한 실패와 지역 소득의 둔화가 눈앞에 펼쳐져도 그들은 노선을 수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실패의 책임을 탐욕스러운 외부 자본의 농단, 중앙정부의 지역 차별적 예산 삭감, 혹은 우리 투쟁의 선명성이 부족했던 탓으로 돌리며 면죄부를 생성해 냅니다. 이른바 도덕적 헤게모니의 횡포입니다. 헤게모니란 단순히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넘어, 어떤 언어를 도덕적이고 올바른 언어로 통용되게 만들 것인지를 선점하는 문화적 지배력입니다. 소상공인과 영세 상인을 보호한다는 "상생"이라는 눈부신 도덕적 표어가 면허증이 되는 한, 실제 그 정책이 상인들을 구원했는지, 청년들의 이탈을 막았는지에 대한 객관적 실증 조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좋은 구호를 가슴에 품고 외쳤다는 도덕적 제스처 자체가, 정책이 훌륭한 결과를 도출했다는 신화적 증거를 대치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보호하려던 것을 함께 파괴하다

대기업의 신규 투자가 막히고 대형 편의 시설이 들어서지 못하면 도시의 고용 인프라는 쇠퇴합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감소하면 활력 있는 청년층이 먼저 도시를 이탈하고, 청년들이 사라진 도시는 급격한 세수 감소와 소비 시장 축소라는 혹독한 대가를 맞이합니다. 전체 소비의 파이가 줄어들면 전통시장과 자영업 등 보호하려 했던 골목상권마저 함께 파멸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자멸적 악순환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인과관계는 잔인하도록 명확합니다. 투자와 상업 개발의 부족은 일자리의 쇠퇴를 낳고, 일자리의 부재는 청년층의 집단 탈출을 부르며, 청년층이 탈출한 도시는 소비력과 지방 재정 자립도를 상실합니다. 소득 창출 기회가 소멸한 원도심은 다시 자영업의 연쇄 붕괴와 도시 생태계의 낙후화로 이어지고, 무너진 도시에서는 마침내 남아있던 주민과 자본마저 추가로 이탈하는 탈출의 열차가 운행되는 것입니다. 상인은 경쟁 기업을 차단했지만 결국 내 가게로 와줄 진짜 손님들을 모두 잃었고, 노동조합은 타협 없는 선명성을 지켰으나 일자리의 영구적 영속성을 훼손했으며, 정치인들은 약자를 사랑한다는 이미지적 훈장을 사수했으나 도시의 미래를 탕진했습니다. 애초에 광주를 파괴하겠다는 악의를 품은 인물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상인회도, 노조도, 활동가도 모두 무언가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극은 더 참담합니다. 주체들의 도덕적 정의감이 결합한 잘못된 정치적 폐쇄 회로가, 한 도시의 문명을 소리 없이 쇠퇴시킬 수 있음을 역사가 생생히 폭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명분이 아니라 결과를 보아야 한다

이 모든 분석의 결론이 결코 유통 대기업의 부당한 요구에 지자체가 무조건 무릎을 꿇고 굴복해야 한다거나, 영세 상인들의 비명을 외면한 채 야만적인 적자생존의 시장주의를 이식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노동조합의 당연한 권리 주장을 이기적인 기득권으로 매도하고 억압하자는 거친 자본주의적 처방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요구되는 시대적 전환은 차단이나 복종의 극단적 이분법을 걷어내고, 테이블 위에 마주 앉아 세련된 '협상'과 정밀한 '조정'의 실력을 발휘하는 일입니다. 기업의 투자가 가진 집객력과 자본력을 강제하여 지역 인재 의무 채용 비율을 올리고, 주변 골목상권을 복구할 공동 마케팅 예산을 징수하며, 지체된 원도심 교통 인프라를 대기업의 돈으로 닦아내어 시민 전체의 이득을 확보하는 고도의 전략적 비즈니스가 바로 정치의 본령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경제정책과 사회 운동의 가치는 숭고한 도덕적 명분이 아니라, 실제로 구성원들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었는지의 객관적인 현실적 결과로만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상생을 부르짖은 투쟁 이후 자영업자들의 실질 소득이 올랐는지, 노조의 강경 노선 이후 공장의 지속가능성이 향상되고 신규 채용이 늘었는지, 청년들의 정주율이 향상되었는지를 꼼꼼하게 실증 계량하여 답해야 합니다. 만약 그 결과가 정반대의 파국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아무리 신성하고 눈부신 명분을 내걸었을지언정 그 정책과 운동 노선은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고 조속히 폐기해야 합니다. 적을 만들고 선동적 갈등을 직조하는 일은 알린스키의 책을 단 한 쪽도 읽지 않은 아마추어조차 본능적으로 완수해 낼 수 있는 쉬운 길입니다. 진정으로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은, 타오르는 불필요한 갈등을 매끄러운 비즈니스 협상으로 종결짓고 다른 성향의 주체들을 조정하여 시민의 밥그릇에 실질적인 빵과 고기를 채워 넣는 생산적 유능함입니다. 정치가 실리를 향한 상호 순환의 기회를 짓밟고 자신들의 도덕적 교리만을 예배하는 신전으로 전락할 때, 그들이 외치는 소중한 보호라는 표어는 결국 지역 문명을 가장 안전하게 고사시키는 파괴의 다른 이름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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