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비평 > davos

클라우스 슈밥: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서 누가 사회의 이익을 정의하는가


클라우스 슈밥의 핵심 사상인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가 표방하는 도덕적 명분의 허실을 짚어보고, 충돌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우선순위를 가리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민주적 통제권이 상실되고 비선출 전문가 관료 집단의 권력이 강화되는지 그 지배 메커니즘을 분석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누가 사회의 이익을 정의하는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처음 들으면 매우 합리적인 말처럼 보입니다. 기업이 주주만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기업은 직원, 고객, 공급자, 지역사회, 국가, 환경, 미래 세대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가 이런 말에 쉽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이 이윤만 좇다가 환경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대하고, 지역사회를 무너뜨리고, 소비자를 속이는 일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주주 이익만을 절대화하는 자본주의가 사회적 반발을 불러온 것도 당연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클라우스 슈밥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탐욕스러운 주주 자본주의의 대안처럼 보였습니다. 기업도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 누가 이해관계자를 대표하는가.
  • 누가 사회의 이익을 정의하는가.
  • 누가 기업이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판단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새로운 권력을 갖습니다.

주주 자본주의의 약점

전통적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1차 책임은 주주에게 있습니다.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하고, 주주는 그 이익을 평가합니다. 소비자는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하고, 시장은 기업의 성과를 심판합니다.

물론 이 체계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시장은 단기 이익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환경오염 같은 외부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나 지역사회의 피해가 주가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대 기업은 시장 자체를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기업이 오직 주가와 배당만을 위해 움직인다면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주 자본주의에는 최소한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평가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이익, 가격, 품질, 소비자 선택, 투자 수익이 기준이 됩니다. 주주가 불만이면 주식을 팔 수 있고, 소비자가 불만이면 상품을 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장의 심판이 불완전하더라도, 책임의 방향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이 명확성을 흐립니다.

이해관계자는 누구인가

이해관계자라는 말은 넓습니다. 직원도 이해관계자이고, 고객도 이해관계자이며, 공급자도 이해관계자입니다. 지역사회도 이해관계자이고, 국가는 물론 환경과 미래 세대까지 이해관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은 아름답지만, 범위가 넓어질수록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직원에게 좋은 일이 소비자에게는 나쁠 수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낮은 가격을 제공하는 일이 노동자에게는 낮은 임금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환경 규제를 강화하면 지역사회에는 좋지만,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서민에게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현재 산업을 줄이면, 현재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자는 하나의 집단이 아닙니다. 서로 충돌하는 여러 집단입니다. 따라서 기업이 모든 이해관계자를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누군가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어느 이해관계가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기업의 책임을 점수화해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전문가, 국제기구, 대형 투자기관, 컨설팅 회사, NGO, 재단, 평가기관입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을 더 도덕적으로 만들자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업을 평가하는 새로운 권력층을 만들어냅니다.

슈밥의 핵심 아이디어

클라우스 슈밥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세계경제포럼의 핵심 사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슈밥은 기업을 여러 이해관계자가 있는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기업은 직원, 고객, 공급자, 국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의 성공과 번영에 의존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말 자체는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건하고 상식적으로 들립니다. 기업이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업은 법의 보호를 받고, 도로와 전력망과 교육받은 노동력과 안정된 사회질서 위에서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책임의 기준입니다.

기업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 사회의 요구는 선거를 통해 정해지는가. 법률로 정해지는가. 소비자의 선택으로 정해지는가. 아니면 국제 포럼과 투자기관과 전문가 그룹이 정하는가.

슈밥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위험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것은 기업의 책임을 말하지만, 그 책임을 누가 규정하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합니다. 그리고 모호한 책임은 언제나 권력자에게 유리합니다.

도덕적 언어의 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법적 명령보다 부드럽습니다. 기업에게 직접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책임 있는 기업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법은 공개적으로 논쟁할 수 있습니다. 법안은 의회를 통과해야 하고, 선거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기준은 훨씬 부드럽게 확산됩니다. 책임 있는 기업, 지속 가능한 기업, 포용적인 기업,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이라는 말은 기업을 압박합니다.

기업은 평판을 두려워합니다. 투자자는 평판 리스크를 두려워합니다. 은행은 규제기관과 여론을 의식합니다. 대기업은 국제기구와 NGO와 언론의 비판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법적 강제가 없어도 기업은 새로운 언어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강력합니다. 그것은 법이 아니라 평판으로 움직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기준으로 움직입니다. 처벌이 아니라 자본 접근성과 사회적 인정으로 움직입니다.

기업은 더 이상 단순히 제품을 잘 만들고 이익을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기업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에 서 있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야 합니다.

책임인가, 통제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필요합니다.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 소비자를 속이는 기업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책임이 어떤 방식으로 부과되는가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업에 대한 공적 규제는 원칙적으로 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법을 만들고, 법원과 행정기관이 집행하며, 언론과 시민사회가 감시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최소한 책임의 경로가 보입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다른 길을 엽니다. 기업에 대한 판단이 법률보다 먼저 평판 기준, 투자 기준, 국제기구 권고, ESG 평가, NGO 캠페인, 대형 자산운용사의 압력으로 이동합니다.

이 방식은 더 빠릅니다. 그러나 덜 민주적입니다.

시민이 직접 정하지 않은 기준이 기업을 움직입니다. 선거로 심판받지 않는 기관들이 기업의 행동을 평가합니다. 기업은 소비자보다 평가기관과 투자기관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책임처럼 보이지만, 통제의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주주에서 전문가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바꾸는 것은 기업의 목표만이 아닙니다. 기업을 심판하는 주체도 바꿉니다.

주주 자본주의에서는 주주와 소비자와 시장이 기업을 평가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서는 전문가와 평가기관과 투자기관과 국제 네트워크가 기업을 평가합니다.

물론 시장의 평가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평가도 언제나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전문가의 평가는 종종 특정한 이념과 시대적 유행을 반영합니다. 오늘의 선진적 기준이 내일은 오류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이 이런 기준에 맞춰 움직이면, 시장경제는 점점 도덕 평가 체계와 결합합니다. 기업은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평가 점수를 관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 성과보다 보고서와 인증과 캠페인이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기업을 새로운 관료주의에 종속시킬 수 있습니다.

기업은 왜 따라가는가

많은 기업은 이런 흐름을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신념 때문에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은 생존을 위해 따라갑니다.

대형 투자기관이 특정 기준을 요구하면 기업은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은행이 대출 조건에 환경·사회 기준을 반영하면 기업은 따라야 합니다. 정부가 향후 규제를 예고하면 기업은 미리 움직입니다. 언론과 NGO가 특정 기업을 공격하면 기업은 평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대응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직접 강제하지 않아도 기업이 스스로 순응하게 만듭니다. 법적 명령이 없더라도, 투자와 대출과 평판과 규제 기대가 결합하면 사실상의 강제가 됩니다.

기업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환경은 이미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적 통제의 특징입니다.

ESG로 이어지는 길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추상적 구호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ESG라는 평가 체계로 이어졌습니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라는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그 결과가 투자와 금융 접근성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입니다.

ESG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에서 출발한 대전환의 중요한 기둥으로 설명됩니다. 기업이 기후 의제, 사회적 의제, 지배구조 기준에 얼마나 순응하는지를 평가하는 체계로 제시됩니다.

ESG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실행 가능한 도구로 바꿉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기업은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철학이라면, ESG는 “그 책임을 점수로 평가하겠다”는 장치입니다.

여기서 권력은 더 구체화됩니다.

  • 누가 점수를 매기는가.
  • 어떤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가.
  • 점수가 낮은 기업은 어떤 불이익을 받는가.
  • 점수가 높은 기업은 어떤 자본을 얻는가.

이 질문은 다음 분석에서 더 자세히 다룰 수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ESG와 결합하는 순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도덕적 권고를 넘어 금융 통치의 도구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역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주주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자가 많아질수록, 그들을 대표한다는 전문가 집단의 힘이 커집니다. 사회 전체를 고려하겠다는 말이 커질수록, 사회 전체의 이익을 해석하는 기관의 힘도 커집니다. 기업이 주주에게만 책임지지 않게 될수록, 기업은 누구에게 책임져야 하는지 더 모호해집니다.

모호한 책임은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모호한 책임은 권력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움직이는 명분이 될 수 있습니다.

주주 자본주의의 문제는 기업이 너무 좁은 기준에 갇힌다는 점입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문제는 기준이 너무 넓어져서, 결국 기준을 정하는 사람의 권력이 커진다는 점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완벽한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더 선한 대안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누가 사회의 이익을 정의하는가

사회의 이익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회 안에는 서로 다른 계층, 직업, 지역, 세대, 가치관이 있습니다. 노동자는 임금을 원하고, 소비자는 낮은 가격을 원하며, 투자자는 수익을 원하고, 환경단체는 규제를 원합니다. 지역사회는 일자리를 원하지만, 동시에 오염은 원하지 않습니다. 현재 세대는 생활비를 걱정하고, 미래 세대는 환경 부담을 걱정합니다.

이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 충돌을 공개적으로 다루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이 정치적 문제를 기업 경영과 전문가 평가의 문제로 바꿉니다. 사회적 갈등을 공개적 정치 과정에서 해결하는 대신, 기업 이사회와 투자기관과 국제 포럼과 평가기관이 조정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기업은 정치 공동체가 아닙니다. 투자기관은 유권자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국제기구와 포럼은 선거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NGO와 재단도 전체 시민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사회의 이익을 정의하고 기업의 행동을 조정한다면, 민주주의의 일부가 시장 바깥의 엘리트 네트워크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그래서 경제 이론이면서 동시에 정치 이론입니다. 그것은 기업의 목적을 바꾸는 동시에, 사회적 결정을 누가 내릴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바꿉니다.

결론: 선한 말 속의 권력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기업은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업은 환경과 노동자와 소비자와 지역사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주 이익만을 절대화하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문제를 낳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좋은 문제의식이 좋은 해법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는 기업이 사회를 고려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누가 사회의 이익을 정의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을 피하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책임의 언어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가 됩니다.

기업이 주주만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업이 선출되지 않은 글로벌 엘리트 네트워크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위험합니다.

주주 자본주의는 기업을 시장에 묶었습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을 도덕 평가자에게 묶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도덕을 평가하는 권력은, 때로 법을 만드는 권력보다 더 깊이 작동합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볼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 기업은 누구에게 책임지는가.
  • 그 책임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 그 기준을 정한 사람은 누구에게 책임지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인간화가 아니라 엘리트 통제의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관련 태그:
← 정원 첫 화면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