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성 위기 사례 ②] 의지력은 정말 배터리처럼 고갈되는가](/_next/image?url=%2Fimages%2Fis-willpower-really-depleted-like-a-battery.png&w=3840&q=75)
의지력은 정말 배터리처럼 고갈되는가
작은 실험은 어떻게 거대한 심리학 이론이 되었는가
해야 할 일을 오래 참고 견디다 보면 나중에는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감정을 억누른 사람은 저녁에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기 쉽고, 엄격하게 식단을 조절하던 사람은 밤이 되면 폭식을 하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을 연이어 내리다 보면 사소한 선택조차 귀찮아지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일상적 현상에 대해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인 설명을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자제력은 무한한 능력이 아니라 제한된 양만 저장되어 있는 일종의 심리적 자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한 번 자제력을 소모하면 저장된 자원이 줄어들고, 따라서 그 다음 상황에서는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현저히 약해진다고 보았습니다. 심리학계에서는 이를 "자아 고갈(ego depletion)" 이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론은 등장하자마자 대중과 학계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력은 근육과 같아서 계속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지친다는 설명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이어트, 학습, 소비, 신체 운동, 분노 조절, 중독 치료, 직장 생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자기통제 문제에 이 이론이 적용되었습니다.
수백 편의 후속 논문이 발표되었고, 자아 고갈은 심리학 개론 교과서의 필수 개념으로 실렸습니다. 유명 자기계발서들은 하루 중 중요한 결정을 의지력이 풍부한 아침에 먼저 내리고, 불필요한 선택을 줄여 의지력을 아껴 사용하라고 앞다투어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사전등록 재현 연구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이 거대한 심리학 이론의 기초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피곤해지거나 집중력을 잃는다는 일상적 관찰 자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한 ‘고갈되는 한정된 자제력 자원’이라는 생리적·심리적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초콜릿을 참은 사람은 퍼즐을 빨리 포기했다
자아 고갈 이론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8년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와 동료들이 발표한 저명한 실험이었습니다.
연구진은 배가 고픈 대학생 참가자들을 실험실로 불러 모았습니다. 참가자들이 들어간 방에는 갓 구운 초콜릿 쿠키와 초콜릿 과자, 그리고 생무가 놓여 있었으며 방 안에는 고소한 초콜릿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 집단은 초콜릿과 쿠키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두 번째 집단은 눈앞의 맛있는 초콜릿을 두고도 먹지 못하게 한 채 오직 무만 먹도록 지시했습니다. 세 번째 통제집단은 음식과 관련된 아무런 과제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지시를 지키는지 확인한 후 방을 나갔습니다. 무를 먹도록 지시받은 참가자들은 초콜릿을 바라보거나 냄새를 맡으며 참아냈고, 이는 눈앞의 유혹을 억제하기 위해 상당한 자제력을 소모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어서 연구진은 모든 참가자에게 도형을 한 번에 그리는 기하학 퍼즐 과제를 부여했습니다. 참가자들에게는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해답이 없는 불가능한 퍼즐이었습니다. 연구진이 측정하고자 했던 것은 정답 여부가 아니라 참가자가 포기하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시도를 지속하는가였습니다.
실험 결과, 초콜릿을 먹은 집단과 음식 과제를 하지 않은 집단은 퍼즐을 평균 19분 이상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었습니다. 반면 초콜릿의 유혹을 참으며 무를 먹어야 했던 집단은 불과 8분 만에 퍼즐 풀기를 빨리 포기했습니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초콜릿을 참는 데 자제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이후 퍼즐을 참아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남은 자제력 자원이 부족해졌다.
음식을 참는 행동과 어려운 문제를 포기하지 않는 행동은 외형상 완전히 다른 활동입니다. 그러나 두 행동 모두 ‘자제력’이라는 동일한 내적 자원을 공통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앞선 과제에서 자원을 사용하면 뒤이어 나오는 과제의 수행 능력이 저하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저녁 시간에 폭식을 하고, 어려운 과제를 미루며, 피곤할 때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는지를 단 하나의 명쾌한 원리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의지력을 하나의 자원으로 설명하다
자아 고갈 이론의 핵심은 단순히 사람이 오랜 노동 후에 피곤해진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을 오래 하면 근육이 피로해지고, 밤을 새우면 주의력이 떨어지며, 단순 과제를 반복하면 지루해진다는 사실은 자아 고갈 이론이 없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아 고갈 이론은 다음과 같은 훨씬 강한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자기통제 행동들이 하나의 공통된 제한된 자원을 소모한다.
단것을 참는 일, 분노를 참는 일, 어려운 계산을 지속하는 일, 충동구매를 피하는 일, 감정을 숨기는 일은 겉으로는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모두 동일한 자제력 저장고에서 에너지를 꺼내 쓴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오전에 직장에서 감정을 억누른 사람은 오후에 식욕을 조절하기 어려워질 수 있고, 복잡한 업무 결정을 연이어 내린 사람은 저녁에 충동적인 지출을 하기 쉽다는 설명이 성립합니다. 이 이론은 인간 행동의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일관된 원리로 매끄럽게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습니다. 자제력 자원의 실체를 직접 측정하지 않고도, 어떤 두 번째 과제에서 수행이 떨어지기만 하면 "자제력이 고갈되었다"고 사후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가자가 지루함을 느꼈거나, 실험에 흥미를 잃었거나, 첫 번째 과제에서 충분히 노력했으니 두 번째 과제에서는 더 이상 노력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 등 수많은 다름 원인들이 '자원 고갈'이라는 한 단어로 덮여버렸습니다.
배터리인가, 근육인가
자아 고갈을 설명할 때 연구자들은 주로 배터리와 근육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배터리는 사용할수록 에너지가 줄어들고 충전 전까지는 동일한 성능을 낼 수 없듯이 자제력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이었습니다. 또한 근육을 사용하면 단기적으로는 피로해지지만 장기 훈련을 통해 강해지듯이, 자제력 역시 장기적으로는 훈련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덧붙여졌습니다.
이 비유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지만,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과학적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 근육의 피로는 ATP 소모, 대사산물 축적, 칼슘 이온 조절 등 생리적 기전으로 직접 측정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아 고갈 이론이 말하는 ‘자제력 자원’은 글루코스(혈당) 소모설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으나 금세 반박되었고, 실제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자원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환논증적 구조에 의존했습니다.
- 참가자에게 자제력이 필요하다고 가정한 과제를 수행하게 합니다.
- 두 번째 과제에서 수행 능력이 저하되는지 확인합니다.
- 수행이 저하되면 첫 번째 과제로 인해 자제력 자원이 고갈되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이 구조는 첫 번째 과제가 실제로 자제력을 소모했는지 직접 측정하지 않았고, 두 번째 과제의 수행 저하가 정말로 자원 부족 때문인지도 입증하지 않은 채, 결과로서 원인을 추론하는 오류를 안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자아 고갈이 될 수 있었다
자아 고갈 연구는 빠르게 확장되어 수많은 변형 과제들이 개발되었습니다.
첫 번째 고갈 과제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행동들이 유도되었습니다.
- 참가자가 자기 감정을 억누르도록 지시했습니다.
-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웃음을 억지로 참도록 유도했습니다.
- 머릿속에 떠오르는 특정 생각을 통제하도록 요구했습니다.
- 주의를 분산시키는 시각 자극을 무시하게 만들었습니다.
- 자동적인 습관 반응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지시했습니다.
- 여러 상품 중에서 하나를 반복하여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 신체적 통증을 견디며 악력기를 오래 쥐게 했습니다.
- 눈앞의 맛있는 음식 유혹을 참도록 만들었습니다.
- 자신의 개인적 신념과 반대되는 의견의 글을 쓰게 했습니다.
뒤이어 수행하는 두 번째 측정 과제 역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었습니다.
- 풀리지 않는 어려운 기하학 퍼즐을 포기하지 않고 풀도록 요구했습니다.
- 간섭 효과가 발생하는 스트루프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 찬물에 손을 담그고 통증을 오래 참도록 유도했습니다.
- 맛있는 단 음식의 섭취량을 억제하도록 했습니다.
- 충동적인 소비 유혹을 스스로 제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도발적 상황에서 상대에 대한 공격적 반응을 억제하게 했습니다.
-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신체 운동을 지속하도록 지시했습니다.
-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인지 과제를 풀게 했습니다.
서로 다른 과제 조합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은 이론의 일반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연한 과제 조합을 통해 유의한 결과가 나오는 조합만 선택하여 발표할 수 있는 연구자 자유도를 넓혀주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어려운 일을 한 후 수행이 떨어지는 거의 모든 현상이 자아 고갈이라는 포괄적 개념 안에 담기면서, 이론의 반증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수십 편의 연구가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2010년 마틴 해거(Martin Hagger) 연구진은 83편의 논문에서 추출한 198개의 효과 크기를 모아 대규모 메타분석을 실시했습니다.
분석 결과, 자아 고갈의 평균 효과 크기는 (d=0.62)로 산출되었으며, 이는 심리학에서 상당히 크고 확고한 효과에 해당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아 고갈은 단순한 가설을 넘어 심리학의 검증된 법칙으로 받아들여졌고, 연구자들은 효과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기보다 이를 강화하거나 회복시키는 방법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이 메타분석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전제가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분석에 포함된 출판 논문들이 실행된 전체 연구들을 왜곡 없이 대표해야 한다는 전제였습니다.
메타분석은 출판되지 않은 실패를 볼 수 없다
메타분석은 여러 연구를 통계적으로 통합하지만, 세상에 출판되어 존재해 있는 자료만을 합성할 수 있습니다.
가설을 입증한 성공적인 연구는 쉽게 출판되는 반면, 효과가 나오지 않은 수많은 실패 연구들이 연구자의 서랍 속에 묻힌다면(출판 편향), 메타분석 결과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효과를 계산하게 됩니다.
20개의 독립된 연구팀이 동일한 실험을 수행했을 때, 실제 효과가 0이더라도 통계적 우연에 의해 1~2개 연구에서는 유의한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유의한 결과들만 학술지에 실리고 나머지가 묻힌다면, 후대 연구자가 출판 논문만 모아 메타분석을 했을 때 확고한 효과가 존재하는 것처럼 착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출판 편향(publication bias)이 만드는 치명적인 한계입니다.
작은 연구일수록 효과가 더 컸다
2014년 에번 카터(Evan Carter)와 마이클 매컬러(Michael McCullough)는 자아 고갈 문헌을 새로운 통계 기법으로 재검토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핵심적인 비정상적 패턴은 표본의 크기가 작은 소규모 연구일수록 효과 크기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보고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표본이 작은 연구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얻기 위해 우연히 매우 큰 효과가 관찰되어야만 출판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반면 표본이 큰 연구는 미세한 효과도 검출할 수 있습니다. 출판 편향이 존재하는 문헌에서는 작은 표본 연구일수록 효과가 부풀려진 결과만 남게 됩니다.
카터와 매컬러가 출판 편향을 보정하는 정밀한 분석을 적용하자, 자아 고갈의 효과 크기는 거의 0에 가깝게 감소했습니다. 수십 편의 출판 논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론의 진실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모두 같은 방법으로 다시 실험하다
문헌의 출판 편향 논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전에 등록된 동일한 프로토콜에 따라 대규모 다기관 재현 연구를 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2016년 해거와 동료들은 전 세계 23개 연구실, 2,141명의 참가자가 참여한 대규모 사전등록 재현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가설, 분석법, 표본 크기를 미리 공개 등록하여 사후적인 데이터 선택을 엄격히 차단했습니다.
표준화된 절차에 따라 실험을 진행한 결과, 자아 고갈의 전체 효과 크기는 (d=0.04)로 측정되었으며, 신뢰구간은 0을 포함했습니다. 수십 편의 기존 논문이 보고했던 효과가 엄격한 사전등록 대규모 재현에서는 사실상 사라진 것입니다.
재현 실패에 대한 반론
이 결과가 발표되자 자아 고갈 이론의 창시자들은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컴퓨터 화면에서 정해진 키를 누르는 표준화된 컴퓨터 과제는 참가자들의 자제력을 충분히 소모시키지 못하는 약한 조작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반론은 나름의 일리가 있었지만, 또 다른 방법론적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어떤 과제가 '진정한 고갈 과제'인지가 결과를 확인한 후에야 사후적으로 판정된다면, 이 이론은 사실상 어떠한 재현 실패 실험으로도 반증할 수 없는 불멸의 이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과제로 다시 시도했지만
과제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1년 또 다른 대규모 사전등록 재현 연구들이 추가로 실행되었습니다.
12개 연구실(1,775명)이 참여한 연구에서는 사전 검증된 과제를 사용하여 (d=0.10)이라는 매우 미세한 효과만을 확인했습니다. 36개 연구실(3,531명)이 참여한 또 다른 연구에서도 사전등록된 주 분석에서는 자아 고갈 효과를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심리학계의 합의는 분명합니다. 전 과제 수행 후 아주 미세한 수행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존에 주장되었던 '하나의 한정된 자제력 자원이 고갈된다'는 강하고 일반적인 이론을 지지하는 엄격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저녁에 무너지는가
자아 고갈 이론의 자원 모델이 무너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피곤할 때 자기통제력을 잃는 일상적 현상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을 ‘비어버린 의지력 배터리’로 설명할 수 없을 뿐이며, 현대 심리학은 다음과 같은 대안적 기전들을 제시합니다.
피로로 인한 생리적 반응
첫 번째 과제를 수행하면서 누적된 신체적·정신적 피로가 인지적 통제력을 전반적으로 저하시켰을 수 있습니다.
과제 반복에 따른 동기 감소
단조롭고 지루한 실험 과제를 반복하면서 두 번째 과제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려는 참가자의 동기(motivation)가 감소했을 수 있습니다.
추가 노력에 대한 보상 평가의 부족
첫 번째 과제에서 충분히 수고했다고 느낀 참가자가 추가적인 보상이 없는 두 번째 과제에 노력을 더 투입할 가치가 없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입니다.
다른 욕구와 휴식 목표로의 전환
인간의 뇌는 하나의 목표에만 지속적으로 자원을 투입하기보다, 일정한 의무를 마친 후 휴식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대체 목표로 유연하게 주의를 전환합니다.
보상 자극으로의 주의 이동
자제력을 발휘한 후에는 해야 할 일보다 즉각적인 보상과 유혹 자극에 주의가 더 민감하게 끌리는 주의 배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지력 고갈에 관한 개인이 가진 신념
"의지력은 쓸수록 고갈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일수록 앞선 과제 후 쉽게 포기하는 반면, "의지력은 쓸수록 강화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수행 저하를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대안적 설명들은 자제력을 물질적 연료로 바라보는 대신, 뇌의 동기, 평가, 목표 우선순위 전환의 과정으로 현상을 재해석하게 해줍니다.
능력의 상실인가, 노력의 재배분인가
자아 고갈 이론은 2차 과제의 수행 저하를 자제력 '능력의 상실'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성이나 보상이 커지면 피곤한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언제든 다시 높은 자기통제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자기통제 실패는 연료가 완전히 떨어진 자동차의 정지라기보다, 상황과 보상 가치를 고려하여 노력을 투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노력의 재배분'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타당합니다.
결정 피로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자아 고갈과 쌍을 이루어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 개념 역시 동일한 한계를 가집니다.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 의지력이 고갈되어 나쁜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지력 자원의 고갈이 아니라 정보 처리 부하, 책임감으로 인한 스트레스, 단순 지루함이 복합 작용한 결과입니다.
자기계발서는 과학보다 빨리 확신했다
자아 고갈 이론이 과학적 검증을 넘어서서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합니다.
첫째, 누구나 피곤할 때 참을성이 떨어지는 일상적 경험과 직관적으로 잘 부합했습니다.
둘째, 실용적인 생활 조언으로 변환하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 중요한 결정이나 과제는 자제력이 충만한 아침에 처리하도록 권장했습니다.
- 하루 동안 내리는 사소한 선택의 횟수를 최소화하도록 조언했습니다.
- 당분이 부족한 식사 직전에는 중요한 판단을 피하라고 강조했습니다.
- 옷차림이나 메뉴 선택 등 사소한 일에 의지력을 소모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 의식적인 자기통제 없이도 행동하도록 정착된 습관 형성을 권장했습니다.
셋째, 자기통제 실패에 대해 "당신의 의지력 배터리가 고갈되었을 뿐"이라는 마음 편한 위로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조언의 실용성이나 심리적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 곧 그 배경 이론의 과학적 진실성을 증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작은 연구가 큰 이론이 되는 과정
자아 고갈 사례는 작은 관찰 실험 하나가 학계의 선택적 선별 구조를 거치며 어떻게 거대한 법칙으로 과장되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 자아 고갈 효과가 확인된 연구들이 선별적으로 출판되었습니다.
- 표본이 작아 우연히 큰 효과가 관찰된 연구들이 주목받았습니다.
-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실패한 실험들은 서랍 속에 묻혔습니다.
- 이질적인 여러 과제들이 '자제력 자원'이라는 단일 효과로 묶였습니다.
-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예외적 결과들은 실험 방법의 숙련도 부족으로 치부되었습니다.
- 특정 과제의 제한적인 수행 저하가 인간 의지력 전체의 보편 법칙으로 과장되었습니다.
각 단계의 미세한 편향들이 누적되어 확고해 보였던 거대 이론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메타분석도 진실을 자동으로 만들지 않는다
자아 고갈 사례가 주는 주요한 교훈 중 하나는, 수많은 연구를 합성한 메타분석조차도 원 데이터 자체가 선별 편향되어 있다면 잘못된 수치적 확신을 정밀하게 포장할 뿐이라는 점입니다.
잘못 선택된 문헌들을 아무리 많이 합쳐도 진실이 자동으로 도출되지는 않습니다. 수치적 정밀함이 곧 진실의 정밀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실을 알아내기 어려운 이유
자아 고갈의 역사는 관찰된 실제 현상과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인과적 이야기 사이의 간극을 깨닫게 해줍니다.
초콜릿을 참은 사람이 퍼즐을 일찍 포기했다는 것은 관찰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제력이라는 한정된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연구자가 덧붙인 하나의 해석 모델입니다.
과학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은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일으킨 진짜 원인이 수많은 대안적 설명 중 무엇인지를 엄격하게 가려내는 일입니다. 자아 고갈 사례는 우리가 그 차이를 잊었을 때 어떤 오류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고입니다.
참고문헌
- Roy F. Baumeister·Ellen Bratslavsky·Mark Muraven·Dianne M. Tice, “Ego Depletion: Is the Active Self a Limited Resour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4(5), 1998.
- Mark Muraven·Dianne M. Tice·Roy F. Baumeister, “Self-Control as a Limited Resource: Regulatory Depletion Pattern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4(3), 1998.
- Mark Muraven·Roy F. Baumeister, “Self-Regulation and Depletion of Limited Resources: Does Self-Control Resemble a Muscle?”, Psychological Bulletin 126(2), 2000.
- Martin S. Hagger·Caroline Wood·Chris Stiff·Nikos L. D. Chatzisarantis, “Ego Depletion and the Strength Model of Self-Control: A Meta-Analysis”, Psychological Bulletin 136(4), 2010.
- Evan C. Carter·Michael E. McCullough, “Publication Bias and the Limited Strength Model of Self-Control: Has the Evidence for Ego Depletion Been Overestimated?”, Frontiers in Psychology 5, 2014.
- Evan C. Carter·L. M. Kofler·D. E. Forster·Michael E. McCullough, “A Series of Meta-Analytic Tests of the Depletion Effect: Self-Control Does Not Seem to Rely on a Limited Resource”,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 144(4), 2015.
- Martin S. Hagger 외, “A Multilab Preregistered Replication of the Ego-Depletion Effect”,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11(4), 2016.
- Jianning Dang 외, “A Multilab Replication of the Ego Depletion Effect”, Social Psychological and Personality Science 1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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